15년째 도자기 연구와 창작작업에 매달리고…
15년째 도자기 연구와 창작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박상욱씨가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무왕리 산골에 만들어놓은 도자기 가마.전국의 유명 도요지를 다니던중 장작불의 생명력에 매료돼 이곳에 장작만으로 도자기를 굽는 가마를 세우게 됐다.
투박하면서도 수더분한 멋을 지닌 분청(粉靑)은 공들여 모양낸 것만이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청자,백자 세계의 통념에 대한 도전이자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귀의하려는 한국 도자기의 한 특징이다.
●관노비 신분서 해방된 기술자들
고려 말 조선 초에 걸쳐 나타난 정치의 불안,국가 기강의 문란,신분구조의 와해,새로운 지배세력의 성장,왜적의 침입 등으로 국가의 통제 아래에 있던 관요(官窯) 기능이 마비되었다.관요에서 관노비로 일하던 도자기 기술자들은 전국 곳곳으로 흩어져서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이들은 국가의 규제없이 자유로이 그릇을 만들 수 있었으므로 활달하고 구김살 없는 자유분방한 멋을 풍기는 그릇을 만들 수 있었다.이 때 만들어진 그릇들을 뭐라 불렀는지를 알려주는 문헌은 없다.이들 그릇을 분청사기(粉靑沙器)-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라는 용어를 처음 쓰게 된 것은 고유섭(高裕燮) 선생의 ‘고려도자와 이조도자’(1963년)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분청의 가장 큰 특징은 물레질로 만든 그릇 몸에다 정선된 백토(白土)를 입히는 분장(粉粧)기법과 그 뒤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무늬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분청사기는 우연한 시대적 산물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는데,그릇이 그 시대의 표정이라는 말과도 일치하고 있다.순박하고 민중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분청그릇은 15세기 초 조선 왕조의 기반이 튼튼히 닦여진 시기와 맞물려서 나타났다.
●세종때 절정의 기법 완성
세종 연간에 걸쳐서 절정의 기법이 완성되었는데 이는 세종 연간 문화의 특징이 민본(民本)을 전제로 한 독창적 민족 문화를 만들어 생활화한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우리에게 맞는 농사법은 ‘농사직설’,우리나라 사람의 질병은 우리나라 약초로써 고치고자 한 ‘향약집성방’,중국 음악과 다른 우리의 가락을 찾기 위한 노력들,우리의 고유 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 등이 좋은 예다.민족적 자각과 민중문화를 포용한 문화의식은 민족에 기초를 두고 민본을 존중하는 조선문화의 새벽이 되었고,이같은 문화의식을 배경으로 하여 태어난 것이 다름아닌 분청사기였다.
●분청사기의 본질은 자유분방함
이렇듯 오랜 역사만큼이나 자유분방함을 근본 정신으로 삼아서 만들어지는 분청 그릇은 대부분의 사기장들이 즐겨 다루어 왔고 현재에도 그러한 분야다.그러나 사기장들이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자유분방함의 본질을 어떻게 터득하여 표현하는가에 있다.많은 작가들이 집요하게 도전해오고 있지만 전통적 분청기법을 제대로 터득하여 현대적인 단순미로 재창조했다거나 듬직한 양감과 아첨없는 장식성,한국인다운 소탈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은 사기장은 매우 적다.이런 만만찮은 길에 들어선 박성욱은 이제 서른 세 살의 젊은 사기장이다.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무왕1리 526번지 산골에다 가마를 박고 아내 이금영(32세),유빈(6세),순빈(4세) 네 식구가 산비둘기처럼 살면서 분청그릇을 빚고 있다.깊은 산골이다 보니 닷새마다 서는 지제장터까지도 십리길이 훨씬 더 되고 초등학교며 과자를 파는 가게도 면소재지에 가야만 한다.
문 : 이 산중에다 작업장을 짓고 생활하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朴 : 지리적 여건이 장작가마 하기에 적합하다고 봤기 때문이죠.장작가마를 앉히려면 우선 넓은 땅이 필요한데,도시 근교가 교통이나 아이들 키우기,문화적 접근성 등이 유리하기는 하지만 땅값이 너무 비싸서 우리처럼 젊은 사람들로서는 엄두를 내기 어렵지요.강원도와 인접해 있어서 장작 조달이 쉽고,여주·광주 등 도자기의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는 훌륭한 현장이 가깝다는 점도 고려되었지요.무엇보다 은사이신 노경조 교수님 작업장이 인근에 있어서 항상 가르침을 얻을 수 있고 토론과 정보의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을 크게 참작했지요.
문 : 도자기를 시작한 시기는 언제쯤이었습니까?
朴 : 1990년 국민대 도자공예학과에 들어가서부터였으니까 이제 겨우 15년째 접어든 셈입니다.쭉 미술공부를 해왔는데 도자기가 매력적이다 싶어 이쪽으로 전공을 했고,지금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 : 도자기의 매력이 어디에 있다고 보았습니까?
朴 : 장작불이었어요.전국의 유명한 도요지인 강진·문경 등을 여행하면서 장작가마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장작불을 보고 있으면 살아 있는 자유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자유라는 말이 너무나 흔해서 시쳇말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그 말을 쓴다는 것이 조금은 혐오스럽고 구역감도 느껴졌거든요.죽은 자유의 쓰레기 무덤 같다는 생각도 있었지요.장작불을 보는 순간 그런 잘못 인식된 것들이 불길에 타버리고 아주 맑고 고요한 힘이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문 : 장작불의 어떤 면이 그같은 신선함을 주던가요?
朴 : 다소 감정적인 면입니다만,자연스러움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해주었습니다.인위적으로 꾸며지고 목적을 노린 계산이 얼마나 위험하고 자유분방함을 저해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것이지요.학교 때 주로 이용한 가스가마로도 표현상 제약을 받지는 않았지만 장작불은 가스가마에서 한 걸음 더 자연,자유에 다가서게 해주었습니다.
●흉내내기·베끼기에 본질 훼손
문 : 불에서 어떤 깨달음을 터득한 것으로 생각되는군요.그런데 하필이면 왜 분청 쪽으로 들어섰습니까? 입문하기는 쉽지만 성공하기는 매우 어려운 분야인데.서로 비슷하기는 쉽지만 바로 그 점에서 몰개성적이고 흉내내기,베끼기로 이어져서 실패하게 되는 함정이라고들 하거든요.작가로서 작품으로 인정받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연구하고 헌신해야 하겠지요.분청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군요.
朴 : 아직 저는 견해라고 할 만한 것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을 알고 있습니다.다만 가마를 서울에서 비교적 먼 이곳에다 박아 놓고 작업하는 이유 중에는 저만의 작업에 집중하고 몰입하여 독창성을 획득하고 싶다는 뜻도 들어 있지요.실제로 오늘날 많은 도예작가들이 분청에 관한 한 모방과 뒤섞임의 혼돈 속에서 분청 고유의 자유분방함이라는 고귀한 정신을 훼손시키거나 놓치고 있다고 봅니다.자유분방함을 제멋대로 해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여긴 데서 나타나는 큰 과오인 줄 압니다.
분청사기의 자유분방함은 이 그릇의 유장한 역사와 심오한 미적 세계에서 응축되고 표현된 아름다움이라고 여깁니다.분청사기를 창안해 낸 옛 선조들은 이미 고려청자라는 거대한 도자 세계를 수백년 넘게 항해해온 오랜 경험과 고도로 숙련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분들입니다.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정신의 바탕 위에서 절정의 기술로 빚어낸 것이 분청사기거든요.뭐랄까요,깨달음의 빛깔이나 향기 같은 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문 : 생활은 어떠세요? 경제적 문제,아이들을 산중에서 키워야 하는 문제,학문의 세계,작업의 성과 등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군요.
朴 : 모두 벅차지요.하지만 분청사기의 멋이 자유분방함이고,그것은 창조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고독과 버거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맛볼 수 있는 귀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 견딜 만합니다.아내가 큰 힘이자 이웃입니다.
문 : 자유분방함은 자신의 내부를 응시하는 가운데서 생겨나는 자유의 힘이라는 말로 들리는군요.분청그릇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요소를 뭐라고 보십니까? 불을 제외하고.
朴 : 흙이지요.흙공장의 흙과 가게에서 파는 유약이 아니라,작가 스스로가 자연에서 얻어 낸 흙과 유약이라고 봅니다.지적하신 흉내내기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작가 특유의 흙과 유약 개발은 곧 작가의 생명이며,진정한 작가 정신이 있어야만 자유분방함의 세계를 엿볼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국민대,강릉대,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도자기를 강의하고 있는 그는 젊은 작가다운 실험 정신과 만만찮은 예술론으로 무장한 우리나라 도자 미래의 한 기대주로 보인다.
2004-04-17 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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