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형 칼럼] ‘盧마임’ 보고 싶다

[이경형 칼럼] ‘盧마임’ 보고 싶다

이경형 기자 기자
입력 2003-12-25 00:00
수정 2003-12-25 00:00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대사 없이 몸짓으로 표현하는 마임,무언극은 일반 연극과는 다른 감흥을 준다.지난주 서울 홍익대 앞 소극장에서 열린 ‘한국 마임 2003’시리즈 가운데 일부 공연을 관람하면서 새삼 느꼈다.

마이미스트들은 페로몬이라는 냄새와 더듬이로 서로 소통하는 개미 세계를 관객들에게 실감 나게 보여주었고,추위와 더위에 반응하는 두 사람의 일상적인 몸짓으로 “가는 정이 고와야 오는 정이 곱다.”라는 인간관계를 익살스럽게 설명해 주었다.

뒤풀이에서 만난 출연자는 마임 연기가 어렵지 않으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몸짓은 사람마다 정의(定義)가 다를 수 있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원초적인 표현을 하기 때문에 관객의 공감을 더 살 수 있다.”고 부연했다.문득 말보다 더 진실한 것이 몸짓이고,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2일 해인사로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을 전격 방문해 서울 외곽 순환고속도로의 사패산 터널 공사를 재개할 수 있도록 불교계의 협조를 얻어냈다.작년 대선 때 자신이 내걸었던 공약을 되물리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차원이긴 하지만,오랜만에 접하는 행동하는 노 대통령의 모습이었다.구차한 변명 없이 잘못된 공약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애로를 터놓고 얘기함으로써 문제를 푸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세모에 되돌아보는 대통령의 그동안 국정 수행 행태는 너무 말이 많았고,그것도 모호한 말로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오죽했으면 전국 대학교수 등 칼럼니스트들이 올해 한국의 정치·사회·경제를 가장 잘 정리할 수 있는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우왕좌왕(右往左往)을 꼽았겠는가.

최근 노 대통령의 ‘10분의1’발언만 해도 대통령 자신의 화법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잘 보여주었다.“대선 때 우리가 쓴 불법 자금의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1만 되어도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말해 ‘독립 검찰’을 곤혹스럽게 했다.이어 며칠 뒤 “합법 불법 다 털어도 350억∼400억원 미만”이라고 말함으로써 ‘10분의1’논란을 다시 증폭시켰고 청와대는 정당활동비를 포함한 숫자라며 불끄기에 바빴다.대통령의 ‘10분의1’발언도 4당 대표 회동 당시 대화의 전후 흐름을 보면,야당의 불법자금 규모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는 강조 화법에서 나온 듯하다.꼭 10%라는 숫자적 한계 의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겠다고 거듭 다짐해 ‘실언’이 ‘대국민 선언’처럼 돼버렸다.

‘대통령 자리’는 강조 화법에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일상적인 단어가 아니다.5000만 민생을 좌우하고,수십억달러의 외국인 투자를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할 수 있는 엄청난 무게의 단어다.자칫 헌정의 중단까지 불러올 수 있는 특별한 단어다.

그렇다면 온 나라가 10% 숫자에 매달려 마음졸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이럴 때 노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보여 줄 해법은 ‘사패산 터널공사 재개’ 방식이라고 본다.검찰 수사에 개의치 말고 ‘10분의1’이라는 표현은 야당의 불법자금 규모에 비해 노 캠프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는 의미,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해명하면 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5월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고 한 적이 있다.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비리 사건이 드러난 후에는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다.

최근 대학가에서 마임 붐이 일고 있는 것은 말 없이도 관객과 깊이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대통령직 사퇴’와 같은 예측불허의 엽기적인 ‘노(盧) 화법’은 금년으로 마감해야 한다.새해에는 노 대통령이 과묵하지만 행동으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진정한 정치 마이미스트가 됐으면 한다.

편집제작 이사 khlee@
2003-12-25 14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결혼식 생략? '노웨딩'에 대한 여러분 생각은?
비용 문제 등으로 결혼식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노웨딩에 대한 여러분은 생각은?
1. 결혼식 굳이 안해도 된다.
2. 결혼식 꼭 해야 한다.
-->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