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나 경찰인데…”

[씨줄날줄] “나 경찰인데…”

정인학 기자 기자
입력 2003-07-23 00:00
수정 2003-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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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요지경 속이다.한 40대 남자가 다짜고짜 경남의 어떤 교육청 관리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나 경찰인데….”라고 말끝을 흐리며 발주 공사 운운하다가 돈을 요구하자 대뜸 100만원을 통장에 송금해 주었다는 것이다.이번엔 일선 시·군의 도시과장과 건설과장에게 똑같은 전화를 했더니 많게는 200만원까지 두말없이 넣어 주더라는 것이다.자그마치 6명의 과장님들이 “나 경찰인데….”라는 한마디에 820만원을 갖다 바쳤다고 한다.공사를 관장하는 과장님이라면 ‘묻지마 협박’이 통했다는 얘기다.

‘나 경찰인데…’ 공갈범에 당한 과장님들의 변명은 한술 더 뜬다.비위 사실이 없는데도 구설수에 오를까봐 돈을 보냈다는 것이다.건설 공사를 담당하는 일선 과장님들은 경찰이라고 사칭하면 돈 몇백만원은 그냥 주는가.공갈범에 선뜻 내놓는 그 돈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돈이란 말인가.그렇다면 ‘나 경찰인데….’라고 협박을 당하자 곧바로 검찰에 신고한 사람이 잘못인가.여러 말 할 것 없이 검찰은 뜨내기 공갈범에 당한 과장님들이 내놓은 돈의 출처를 반드시 밝혀 내야 한다.

‘다 알면서…’ 풍토라는 게 있다.엊그제 4억달러 대북 송금 사건 2차 공판이 있었다.한때는 술잔을 부딪치며 호탕하게 웃음을 주고받았을 사람들이 핵심 쟁점마다 언성을 높여가며 발뺌과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고 한다.아무 일도 없었는데 5000억원에 이르는 돈이 무시로 대출 되고,아무 말도 안 했는데 가뜩이나 재정난을 겪던 현대가 정부를 대신해 1억달러나 되는 돈을 송금했겠는가.일도 없고 말도 없었을지도 모른다.아마 주고받은 말이 있다면 ‘다 알면서….’가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요즘 ‘변명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허물이 드러나면 성찰하기보다는 남의 탓으로 돌려 놓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다.사회 지도층 인사의 언행이 문제되면 언론 책임으로 둔갑한다.언론의 실수를 예측하지 못한 최소한의 책임조차 거부하려 한다.서로 ‘다 알아서’ 한 일을 이제와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게 잘못이라고 억지를 부린다.염치 불감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구설수를 저어해 공갈범에게 몇백만원을 주었다는 파렴치한 변명 따위가 통용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인학 논설위원

2003-07-23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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