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패권주의가 횡포를 부리고 있다.미대륙을 정복한 조상들의 후예답게 그들은 전세계를 초법적인 헤게모니 싸움판으로 전락시키고 있다.이 싸움판에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초강대국이 필요로 하는 전리품만이 소중할 뿐이다.국제법이니 국제기구니 하는 것들은 강대국의 놀음을 방지할 의지도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놀음판을 그럴싸하게 포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문명은 아주 노골적으로 야만의 얼굴을 드러낸다.마치 약육강식의 동물사회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그것이 인간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야만으로의 회귀를 강요한다.
야만속에서라도 살아남으려면 그 싸움판의 심부름꾼 노릇일망정,아니면 들러리 역할일망정 열심히 떠맡아야 할 판이다.
노무현 정부의 파병 결정은 바로 이에 해당된다.그런데 이 싸움판은 이라크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우리의 일상 자체가 그 싸움판과 유사한 게임의 틀 속에 갇혀 있다.
야만으로의 회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서구의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문명의 역사가 예고해온 것이었다.이미 1940년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경고했다.
그 대표적 인물인 호르크하이머는 파시즘이 이성의 자기 파괴와 이로 인한 새로운 야만상태를 드러낸 것으로 간파했다.그는 ‘이성의 종언’을 고하면서 도구적 이성을 비판했다.근대문명은 이성을 주로 실용적 도구로 간주하고 효용성만을 중시해온 결과 이성이 비판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유를 사유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오늘에 와서 우리의 이성은 보다 더 철저하게 효용성,유용성,계산가능성에 복종하면서 목적달성을 위한 도구,지배의 도구로 기능한다.여기서 질적인 것이나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은 배제되기 십상이다.개인의 삶과 국가의 경쟁력은 모두 수치로 측정되며 이성의 능력은 바로 그 수치를 달성하는 데에 집중 투자된다.
그 수치가 왜 절대적 목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도 필요도 없다.우리의 사고와 이성은 단지 그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간주되기 때문이다.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경제적·정치적 지배의 독점구조가 심화될수록 도구적 이성을 더 적극 가동시키는 일만이 중요해질 뿐이다.
미국의 부시 정부는 바로 도구적 이성의 절대명령과 그 게임의 실익을 극대화하는 폭력적 방편으로 전쟁을 불사한 집단이다.이 전쟁은 우발이 아닌 필연으로,불가항력이 아닌 치밀한 기획과 선택의 산물이다.나치즘이 수백만의 유태인들의 목숨을 필요로 했다면,21세기의 아메리카니즘은 수많은 아랍인들을 그 제물로 요구했다.
나치즘을 타도한 승전국으로서 20세기의 강자가 되었던 미국은 이제 초강자로 거듭나기 위해 또 다른 치욕의 역사를 주도하는 나라가 되었다.설사 미국이 승전을 하더라도,또 이라크 국민이 철권통치를 제거시킨 ‘해방군’으로 미군을 환영한다고 하더라도,이라크 공격의 역사가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미국이 이러한 역사에 대한 반성을 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 명분을 인정받게 된다면,우리의 역사는 구제불능의 야만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미국의 횡포에 제동을 걸었던 나라들조차도 이제 와서는 이라크의 전리품을 챙기는 일에 열중한다는 소식이다.보통 사람들은 기름값이 떨어지고 주가가 올라가고 경기가 살아나는 것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이라크 전쟁의 득실을 따지는 것,그것이 우리들의 생존전략에 미치게 될 파급효과를 따지는 것만이 의미 있는 과제처럼 떠오른다.
이라크 전쟁이 끝난들,도구적 이성이 요구하는 그 게임의 규칙은 우리들의 일상을 생존의 전쟁터로 지속시키고 있다.그렇다면 이처럼 인간의 삶이 ‘전쟁터’가 되어버린 까닭은 무엇이며,우리는 과연 이를 불가피한 것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이 영 자 카톨릭대 교수 사회학
이런 상황에서 인류문명은 아주 노골적으로 야만의 얼굴을 드러낸다.마치 약육강식의 동물사회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그것이 인간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야만으로의 회귀를 강요한다.
야만속에서라도 살아남으려면 그 싸움판의 심부름꾼 노릇일망정,아니면 들러리 역할일망정 열심히 떠맡아야 할 판이다.
노무현 정부의 파병 결정은 바로 이에 해당된다.그런데 이 싸움판은 이라크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우리의 일상 자체가 그 싸움판과 유사한 게임의 틀 속에 갇혀 있다.
야만으로의 회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서구의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문명의 역사가 예고해온 것이었다.이미 1940년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경고했다.
그 대표적 인물인 호르크하이머는 파시즘이 이성의 자기 파괴와 이로 인한 새로운 야만상태를 드러낸 것으로 간파했다.그는 ‘이성의 종언’을 고하면서 도구적 이성을 비판했다.근대문명은 이성을 주로 실용적 도구로 간주하고 효용성만을 중시해온 결과 이성이 비판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유를 사유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오늘에 와서 우리의 이성은 보다 더 철저하게 효용성,유용성,계산가능성에 복종하면서 목적달성을 위한 도구,지배의 도구로 기능한다.여기서 질적인 것이나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은 배제되기 십상이다.개인의 삶과 국가의 경쟁력은 모두 수치로 측정되며 이성의 능력은 바로 그 수치를 달성하는 데에 집중 투자된다.
그 수치가 왜 절대적 목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도 필요도 없다.우리의 사고와 이성은 단지 그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간주되기 때문이다.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경제적·정치적 지배의 독점구조가 심화될수록 도구적 이성을 더 적극 가동시키는 일만이 중요해질 뿐이다.
미국의 부시 정부는 바로 도구적 이성의 절대명령과 그 게임의 실익을 극대화하는 폭력적 방편으로 전쟁을 불사한 집단이다.이 전쟁은 우발이 아닌 필연으로,불가항력이 아닌 치밀한 기획과 선택의 산물이다.나치즘이 수백만의 유태인들의 목숨을 필요로 했다면,21세기의 아메리카니즘은 수많은 아랍인들을 그 제물로 요구했다.
나치즘을 타도한 승전국으로서 20세기의 강자가 되었던 미국은 이제 초강자로 거듭나기 위해 또 다른 치욕의 역사를 주도하는 나라가 되었다.설사 미국이 승전을 하더라도,또 이라크 국민이 철권통치를 제거시킨 ‘해방군’으로 미군을 환영한다고 하더라도,이라크 공격의 역사가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미국이 이러한 역사에 대한 반성을 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 명분을 인정받게 된다면,우리의 역사는 구제불능의 야만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미국의 횡포에 제동을 걸었던 나라들조차도 이제 와서는 이라크의 전리품을 챙기는 일에 열중한다는 소식이다.보통 사람들은 기름값이 떨어지고 주가가 올라가고 경기가 살아나는 것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이라크 전쟁의 득실을 따지는 것,그것이 우리들의 생존전략에 미치게 될 파급효과를 따지는 것만이 의미 있는 과제처럼 떠오른다.
이라크 전쟁이 끝난들,도구적 이성이 요구하는 그 게임의 규칙은 우리들의 일상을 생존의 전쟁터로 지속시키고 있다.그렇다면 이처럼 인간의 삶이 ‘전쟁터’가 되어버린 까닭은 무엇이며,우리는 과연 이를 불가피한 것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이 영 자 카톨릭대 교수 사회학
2003-04-14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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