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에세이] 바람꽃이 손내미는 제주의 ‘오름’

[공직자 에세이] 바람꽃이 손내미는 제주의 ‘오름’

우근민 기자 기자
입력 2003-02-26 00:00
수정 2003-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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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서점 어디를 가더라도 지난 1995년 출간된 이후 줄곧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독자의 손을 기다리는 책을 발견할 수 있다.‘오름나그네’라는 제목의 이 책은 원로 언론인이자 산악인인 고 김종철 선생이 도내 330여 오름을 일일이 답사한 순례기를 모은 책이다.

‘오름’은 제주섬 전역에 옹기종기 몰려 있는 기생화산을 일컫는 제주어.그 속에는 온갖 식물이 다투어 피어 있고,말과 노루가 뛰놀며,샘과 계곡이 숨어 있는가 하면,‘제주는 신들의 고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1만 8000신(神)들의 이야기가 있다.

올림포스 언덕이 그리스신화의 신의 거처라면 한라산을 비롯한 오름들은 제주 신들의 거처다.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통신망 구실을 했다.때로는 항쟁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수려한 풍광에 넋을 잃은 많은 문객들이 시로 화답했으며 목축의 근거지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이렇게 오름은 저마다 제주섬 사람들의 숨결을 가슴 깊이 끌어안고 수만년의 세월을 건너왔다.

해마다 이맘 때면 사람들은 제주에서 전하는 화신을 보기 위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찾아온다.섬 곳곳에 피어 있는 동백을 보며 동백보다 더 붉은 사랑을 약속하기도 하고 알싸한 향기를 피어내는 수선화에 코끝을 묻기도 한다.온통 노랗게 흐드러진 유채꽃밭에 들러 한껏 웃음을 지어보기도 하고 한라산 중턱에 지천으로 핀 진달래 밭에서 잠시 정신을 놓기도 한다.

하지만 제주에는 이런 꽃들만 있는 게 아니다.새싹이 트자마자 또는 새싹이 트기도 전에 꽃을 피우는 식물들이 있다.높은 산정에 하얀 눈이 쌓여 있고 계곡에도 아직 잔설이 남아 있을 무렵 온 몸으로 겨울을 밀어내며 인간 세계에 봄소식을 알리는 전령들이 있다.

노루귀·바람꽃 그리고 ‘얼음새꽃’이라 불리는 복수초….이름만 들어도 벌써 봄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 꽃들은 어쩌면 사람보다 더 봄을 그리워했기에 먼저 피는지 모른다.

제주 사람들이 언제나 자연과 이웃되어 살아 왔던 모습을 보여주는 예로 ‘코시’라는 것이 있다.이것은 밖에서 술을 마시거나 식사를 하게 될 경우 토속신과 조상 그리고 자연과 음식을 나누는 의미에서 술과음식을 먼저 뿌리는 ‘의식’을 말한다.

인간의 모든 삶을 결코 자연과 분리해 생각하지 않았던 제주 선인들의 덕목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간혹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로부터 바닷가 풍경을 감상하고 나면 더 볼 것 없다는 얘기를 듣는다.하지만 그것은 모르고 하는 말이다.제주의 오름과 들녘 곳곳에는 아직도 사람의 발길이 좀체 닫지 않은 비경이 숨어 있으며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곳이 결코 한둘이 아니다.얼마 전부터 제주를 다녀가는 분들 사이에서 오름트래킹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무척 반가운 소식이다.새 봄의 기운이 섬 곳곳에 가득한 이 계절,제주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오름에 올라 원시의 바람속에 몸과 영혼을 맡겨볼 것을 권한다.

그것이야말로 제주의 참모습과 그에 얽힌 오래된 이야기들을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진정으로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3-02-26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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