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유난히 ‘특별대우’를 선호한다.공정한 대우,정당한 대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구체적인 상황에 부딪히면 정당한 대우는 뒷전으로 밀린다.자기만,자기 자식만,자기 가족만 특별대우를 받으면 다른 사람,다른 사람의 자식,다른 사람의 가족은 어떤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인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교통신호를 위반했으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이 공정하고,정당한 대우다.그런 상황에서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하고 말하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더 나아가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 줄 아느냐.” 또는 “내 아들이 누구인 줄 아느냐.” 하고 말하며 특별대우를 바라는 것은 이 특별대우라는 것이 높은 지위나 권력을 가진 사람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까지 확장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렇게 부와 권력은 서로를 재생산하며 대물림된다.그래서 특별대우를 받아 본 사람은 대를 이어 그런 특별대우를 받게 하려고,그리고 특별대우를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자식만이라도 특별대우를 받게 하려고,개개인의 능력과 적성과 흥미를 무시한 채 ‘특별대우 티켓’을 따기 위한 맹목적 경쟁속에 자신과 자녀의 인생을 내맡긴다.
누군가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그 특별대우 받는 사람으로 인해 차별대우 받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사람들이 병원이나 매표소에서 차례로 줄을 서 있는데 누군가 줄을 서지도 않은 사람이 지위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사람을 특별대우해 준다면,그래서 그 사람의 일을 먼저 처리해 준다면,앞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차별대우를 받는 셈이 된다.이러한 일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특별대우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결코 당당하지 못하다.
그런데 그런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더 자랑스러워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보통 사람들은 행여 그런 사람들을 특별대우하지 않음으로써 해를 입을까봐,혹은 그들을 특별대우함으로써 뭔가 특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 때문에,특별대우를 기대하는 부류에게 ‘알아서 기는’현상이 발생한다.
오히려 이와 같이 비정상적으로 ‘사회가 굴러가는’원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뭘 모르는 융통성 없는 사람’취급을 당하는 것이 현실이다.편법을 융통성과 혼동하는 사회인 것이다.
사회의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열심히 일하고 정당하게 순서를 기다리면 자기가 마땅히 받을 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될 때,그런 특혜를 기대하거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특별대우를 해 주는 사람들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특별대우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 것이다.
뭔가 힘을 가진 사람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특혜’ 혹은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그런 힘을 가진 사람을 ‘알아서 배려’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그렇게 ‘알아서 배려’해 주는데 못이기는 척하며 이익을 챙기는 사회가 21세기에도 발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떤 사람이 그 위치에 올라도 똑같은 종류의 비리가 생기는 것은 바로 이런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그리고 우리 문화 속에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일부 바람직하지 못한 정신상태에 기인한다.
이제는 정직하게,고지식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잘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그러한 사람이 잘 되지 못하고,뭔가 특혜를 바라며 편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계속 잘되는 사회 속에서는,정직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나 왜 나만 손해를 보는가 하는 마음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편법이 대세가 되는 사회가 아닌,정당한 방법이 대세가 되는 사회가 하루빨리 와야한다.어떤 지위에 있든 공정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 보장된다면,굳이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끊임없이 부당한 방법까지 동원해 가며 노력하는 사람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각자 자기 능력에 맞는 위치에서 행복하게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은영 서강대교수 신문방송학
교통신호를 위반했으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이 공정하고,정당한 대우다.그런 상황에서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하고 말하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더 나아가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 줄 아느냐.” 또는 “내 아들이 누구인 줄 아느냐.” 하고 말하며 특별대우를 바라는 것은 이 특별대우라는 것이 높은 지위나 권력을 가진 사람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까지 확장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렇게 부와 권력은 서로를 재생산하며 대물림된다.그래서 특별대우를 받아 본 사람은 대를 이어 그런 특별대우를 받게 하려고,그리고 특별대우를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자식만이라도 특별대우를 받게 하려고,개개인의 능력과 적성과 흥미를 무시한 채 ‘특별대우 티켓’을 따기 위한 맹목적 경쟁속에 자신과 자녀의 인생을 내맡긴다.
누군가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그 특별대우 받는 사람으로 인해 차별대우 받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사람들이 병원이나 매표소에서 차례로 줄을 서 있는데 누군가 줄을 서지도 않은 사람이 지위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사람을 특별대우해 준다면,그래서 그 사람의 일을 먼저 처리해 준다면,앞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차별대우를 받는 셈이 된다.이러한 일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특별대우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결코 당당하지 못하다.
그런데 그런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더 자랑스러워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보통 사람들은 행여 그런 사람들을 특별대우하지 않음으로써 해를 입을까봐,혹은 그들을 특별대우함으로써 뭔가 특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 때문에,특별대우를 기대하는 부류에게 ‘알아서 기는’현상이 발생한다.
오히려 이와 같이 비정상적으로 ‘사회가 굴러가는’원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뭘 모르는 융통성 없는 사람’취급을 당하는 것이 현실이다.편법을 융통성과 혼동하는 사회인 것이다.
사회의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열심히 일하고 정당하게 순서를 기다리면 자기가 마땅히 받을 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될 때,그런 특혜를 기대하거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특별대우를 해 주는 사람들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특별대우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 것이다.
뭔가 힘을 가진 사람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특혜’ 혹은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그런 힘을 가진 사람을 ‘알아서 배려’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그렇게 ‘알아서 배려’해 주는데 못이기는 척하며 이익을 챙기는 사회가 21세기에도 발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떤 사람이 그 위치에 올라도 똑같은 종류의 비리가 생기는 것은 바로 이런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그리고 우리 문화 속에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일부 바람직하지 못한 정신상태에 기인한다.
이제는 정직하게,고지식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잘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그러한 사람이 잘 되지 못하고,뭔가 특혜를 바라며 편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계속 잘되는 사회 속에서는,정직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나 왜 나만 손해를 보는가 하는 마음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편법이 대세가 되는 사회가 아닌,정당한 방법이 대세가 되는 사회가 하루빨리 와야한다.어떤 지위에 있든 공정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 보장된다면,굳이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끊임없이 부당한 방법까지 동원해 가며 노력하는 사람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각자 자기 능력에 맞는 위치에서 행복하게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은영 서강대교수 신문방송학
2002-09-20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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