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환상문학은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해리 포터 신드롬’에,영화로 만든 ‘반지의 제왕’이 국내에서 놀라운 바람을 일으킨 데서 보듯 안정적 소비가 담보된 거대한 시장이 형성돼 있어서다.그런가 하면 많은 문학인들이 ‘우울한 문화적 편식현상’이라고 지적할 만큼 순수문학과 대비한 비교선호도도 높다.
반면 “판타지는 변형된 무협소설로,그 성공은 곧 상업주의의 승리”(평론가 정과리)라거나 “허섭스레기”(소설가 김영하)라는 극단적인 평가도 있다.문단의 주류를 이루는 이런 시각에 밀려 “순수와 판타지의 이분법적 구분은 옳지 않다.”는,환상문학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의외로 작다.
그렇다면 이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환상성이 한국 현대문학에서는 어떤 위상을 갖고 있으며,그 미래성은 또 어떤가.최근 발간된 ‘문학·판’가을호가 다룬 특집 ‘문학과 환상성’을 토대로 실태와 가능성을 짚어 본다.
■한국문학의 환상성 수용 =‘홍길동전’ 등 고전소설을 제외하면 우리 문학에서의 환상성은 특정한 계보를 형성했다기보다는 ‘텍스트속에 적절히 소화돼 있는’형식을 보여왔다.‘현실과 환상을 잇는 언어를 주조해 왔다.’는 평가를 듣는 소설가 이제하의 경우 지난 73년 첫 창작집 ‘초식’에서 ‘저항으로서의 환상’을 다룬 이래 ‘환상지’에서는 10년 전에 사별한 아내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는,고전적 환상성을 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환상 지향이 초창기 실험으로 그친 게 아니라 지난해 출간한 ‘독충’에서 보듯 지금까지도 면면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평론가 박철화는 “이제하에게 환상성은 존재의 자유를 호흡하는 숨길”이라고 진단한다.
윤후명의 ‘돈황의 사랑’은 시적 상상력을 통해 낭만적 환상성을 드러내보인다.그는 ‘꿈’을 환상과 현실을 잇는 연결고리로 삼아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환상성의 계보는 90년대 윤대녕과 배수아로 이어진다.윤대녕은 ‘남쪽 계단을 보라’에서 현실과 신비,사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존재의 깊이를 재려고 든다.배수아 역시 작품 ‘철수’를 통해 ‘우리가 아는 현실이 전체가 아니라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환기시킨다.‘피뢰침’과 ‘흡혈귀’의 김영하는 애당초 ‘판타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작품을 써낸 경우로 사이버 세대의 대표주자다운 면모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듣는다.
■한국 환상문학의 미래= 환상문학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아직 인색하다.평론가 하응백의 지적처럼 ‘문학적 미래가 없는 신종 문화상품’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그러나 송병선(한국 외국어대 강사)이 ‘해리 포터'를 예로 들어 “문화산업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훌륭한 문학작품으로서 문학의 미래 혹은 가능성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고 한 지적도,엄밀한 의미에서는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등 명백히 상업적 이해에 의해 창조된 외국의 환상문학을 겨냥한 평가이지,우리 문학의 환상성을 지적한 말은 아니다.
우리 문학의 환상성은 아직 정확한 평가가 이르다.박철화는 “우리 고소설의 환상성이 현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됐으며,국권 침탈-이데올로기 갈등과 한국전쟁-분단과 권위주의 체제 성립 등 파행적 현대사가,사실주의를 벗어난 다른 미학적움직임의 형성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든다.
결국 환상문학이 ‘문학의 전복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채 새로운 환상을 빌미로 상업성에 영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문학의 환상성은 이런 평가로부터 일단 자유로워 보인다.우리 문학이 드러낸 한계,즉 과도한 현실중시에 대한 반작용의 의미 외에도 문학적 상상력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의 일단을 환상성에서 보기 때문이다.
심재억기자 jeshim@
반면 “판타지는 변형된 무협소설로,그 성공은 곧 상업주의의 승리”(평론가 정과리)라거나 “허섭스레기”(소설가 김영하)라는 극단적인 평가도 있다.문단의 주류를 이루는 이런 시각에 밀려 “순수와 판타지의 이분법적 구분은 옳지 않다.”는,환상문학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의외로 작다.
그렇다면 이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환상성이 한국 현대문학에서는 어떤 위상을 갖고 있으며,그 미래성은 또 어떤가.최근 발간된 ‘문학·판’가을호가 다룬 특집 ‘문학과 환상성’을 토대로 실태와 가능성을 짚어 본다.
■한국문학의 환상성 수용 =‘홍길동전’ 등 고전소설을 제외하면 우리 문학에서의 환상성은 특정한 계보를 형성했다기보다는 ‘텍스트속에 적절히 소화돼 있는’형식을 보여왔다.‘현실과 환상을 잇는 언어를 주조해 왔다.’는 평가를 듣는 소설가 이제하의 경우 지난 73년 첫 창작집 ‘초식’에서 ‘저항으로서의 환상’을 다룬 이래 ‘환상지’에서는 10년 전에 사별한 아내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는,고전적 환상성을 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환상 지향이 초창기 실험으로 그친 게 아니라 지난해 출간한 ‘독충’에서 보듯 지금까지도 면면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평론가 박철화는 “이제하에게 환상성은 존재의 자유를 호흡하는 숨길”이라고 진단한다.
윤후명의 ‘돈황의 사랑’은 시적 상상력을 통해 낭만적 환상성을 드러내보인다.그는 ‘꿈’을 환상과 현실을 잇는 연결고리로 삼아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환상성의 계보는 90년대 윤대녕과 배수아로 이어진다.윤대녕은 ‘남쪽 계단을 보라’에서 현실과 신비,사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존재의 깊이를 재려고 든다.배수아 역시 작품 ‘철수’를 통해 ‘우리가 아는 현실이 전체가 아니라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환기시킨다.‘피뢰침’과 ‘흡혈귀’의 김영하는 애당초 ‘판타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작품을 써낸 경우로 사이버 세대의 대표주자다운 면모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듣는다.
■한국 환상문학의 미래= 환상문학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아직 인색하다.평론가 하응백의 지적처럼 ‘문학적 미래가 없는 신종 문화상품’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그러나 송병선(한국 외국어대 강사)이 ‘해리 포터'를 예로 들어 “문화산업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훌륭한 문학작품으로서 문학의 미래 혹은 가능성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고 한 지적도,엄밀한 의미에서는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등 명백히 상업적 이해에 의해 창조된 외국의 환상문학을 겨냥한 평가이지,우리 문학의 환상성을 지적한 말은 아니다.
우리 문학의 환상성은 아직 정확한 평가가 이르다.박철화는 “우리 고소설의 환상성이 현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됐으며,국권 침탈-이데올로기 갈등과 한국전쟁-분단과 권위주의 체제 성립 등 파행적 현대사가,사실주의를 벗어난 다른 미학적움직임의 형성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든다.
결국 환상문학이 ‘문학의 전복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채 새로운 환상을 빌미로 상업성에 영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문학의 환상성은 이런 평가로부터 일단 자유로워 보인다.우리 문학이 드러낸 한계,즉 과도한 현실중시에 대한 반작용의 의미 외에도 문학적 상상력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의 일단을 환상성에서 보기 때문이다.
심재억기자 jeshim@
2002-08-31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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