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장] 불법체류자 자진신고 현장에서

[대한광장] 불법체류자 자진신고 현장에서

유시춘 기자 기자
입력 2002-05-16 00:00
수정 2002-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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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1일 오전 9시.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옛 남부지원터.담장을 따라 늘어선 행렬은 인근 아파트 단지와 공원에 이르기까지 200m쯤 계속된다.행렬을 따라 중국어와 영문 표기의,‘자진신고’에 필요한 사진·승선권·항공권 등과 관련한 ‘이동식 간이 상점’도 늘어서 있다.

건물 앞마당에는 서류작성을 마친 300여명의 불법체류자들이 영등포경찰서 방범순찰대의 지휘 아래 질서를 유지하며움직인다.쪼그려 앉아 있지만 그래도 임시로 설치한 차일이 있어 햇볕을 가릴 수 있다.간혹 금발의 러시아 여성과 가무잡잡한 방글라데시인,필리핀인이 눈에 띄지만 우리와 구분되지 않는 조선족과 한족이 대부분이다.이루지 못한 ‘코리안 드림’으로 불법 낙인이 찍힌 이들이다.

26만여명으로 추산되는 이들 노동자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의 예상을 뛰어넘어 11일 현재 15만명 이상 신고를 마쳤다.

접수 초기에 21개이던 창구를 47개로 늘려 하루 6000여명의 접수처리를 하고 있는 과다한 행정업무에 큰 도움을 주는민간단체가 있다.

까다로운 절차와 고용된 사업주의 비협조로 어려움이 많은데다 우리말이 서툴러 3중고를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3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서류대필과 친절한 안내를 도맡고 있다.성남과 구로동 두 곳에서 일찍부터 이들 외국인노동자가 최소한의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중국 동포의 집’과 ‘외국인 노동자의 집’이 그들이다.이들 불법체류자는 정부기구인 주한 외국공관보다도 이 NGO를한결 친근하게 여긴다.이들 단체를 방문해 설명회를 개최하고 홍보전단을 배포한 법무부의 기획의도는 적중했다.일시적 합법체류 승인인 셈인 자진신고 이후의 대책이 큰 숙제로 남아 있지만 어쨌든 26만여명이 ‘불법’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인권보호의 측면에서는 우선 반가운일이 아닐 수 없다.

파출부로 일하는 조선족 여인이 유니폼 차림의 아파트경비원을 경찰관으로 오인하고 여러 차례 혼절하듯이 도망다녔다는 일화는 가슴아픈 이야기가 아닌가.이들 NGO 자원봉사자는 접수 초기에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햇볕 아래 서너시간씩 서 있는 노동자들에게 생수를 제공하고,법무부 당국에 천막을 칠 것을 요청하고,접수업무가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조력했다.이들의 대표인 김해성 목사는 동분서주하느라 햇볕에 그을린 농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진신고가 결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에이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그러나 이렇게 신고율이 높은 것은 ‘불법’의 낙인을 벗고자 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갈급한 요구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21세기 지구촌 시대에,경제력의 규모 10위권대에 있는 국가가 외국인 노동자 78%를 불법으로 방치하고,이들을 죄인다루듯 하며 월평균 276시간 부려먹으면서 80만원 주는 짓은 부끄러운 일이다.

92년에 ‘기피업종’의 인력난 타개책으로 시작된 산업연수생제도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지적된 바 있다.

‘송출비리’를 비롯해 개선이 시급한 관행과 제도는 관계부처가 이미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독일식 고용허가제 도입 등의 대안도 제기되고 있으며,노동부 등은 이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안다.

5월 가정의 달,대부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역설적으로 가족과 생이별할 수밖에 없는 이들 ‘낮은 곳’에 거주하는노동자들의 ‘불법’을 해소해주고자 법무부와 자원봉사자들이 상호신뢰 속에 호흡을 함께 하는 문래동의 풍경은 그나마 신록처럼 조금 풋풋하다.민간단체의 구슬땀과 이를 고맙게 여기는 당국자와,감사패를 굳이 거절하며 나중에 하나님께 받겠다는 목자가 있다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문래동 현장이 고단한 이방인의 꿈이 태동하는 희망의 거처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유시춘 국가인권위원·작가
2002-05-16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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