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기술자에서 대학교수로….’ 대전 우송공업대 식품공학과 신철수(申喆秀·51) 교수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빵 기술자다.
하지만 그가 운영하는 ‘성심당 제과기술 전문학원’은 국내 최고의 빵 기술을 배우려는 대학생 제자들로 가득하다.
신 교수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1962년 서울 무학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와 대광중학교에 잇따라 합격했지만 평생 정치판만 떠돌던 아버지는 맏아들(申同秀 대구시 정무부시장) 이외는 신경쓰지 않았다.
4남4녀중 셋째 아들인 신 교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자 고향인 충남 부여로 내려가 농사일을 거들다 무작정상경,메리야스공장과 자동차 정비공장 등을 전전했고 66년서울 돈암동에 있는 제과점 ‘태극당’에 취직했다.
그는 “처음에는 케익에 생일이나 축하합니다 등의 영어 철자를 틀리게 써 선배들에게 숱하게 야단을 맞았다”고 회고했다.그렇게 10년 동안 제과기술을 배워 부공장장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얼마 뒤 서울 강남에 자신의 제과점을 냈다.그러나첫 제과점은 불이 나 망했고 인근에 다시 차렸지만 장사가 안돼 빚만 진 채 문을 닫았다.
실의에 빠진 그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는 등 잠시 ‘외도’를 고려했지만 결국 제과점으로 돌아왔다.
“친구인 사장 밑에서 점원으로 일했지만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편했다”는 그는 86년 12월 성심당제과점의 공장장을맡아 대전으로 내려왔다.97년 현재의 학원을 차리고 독립할때까지는 그가 구워낸 빵 맛은 대전지역에서 최고를 자랑했다.그는 92년 노동부가 주관하는 ‘제과기능장’ 시험에서국내에서 처음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그리고 이 합격증은 97년 국내 명문대 출신과 프랑스 등 해외유학파 등을제치고 우송공업대 교수로 채용되는 발판이 됐다.
신 교수는 “98년부터 가르친 제자들이 직장을 구했다며 찾아올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며 “부지런히 일을 하면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글 대전 이천열기자 sky@
하지만 그가 운영하는 ‘성심당 제과기술 전문학원’은 국내 최고의 빵 기술을 배우려는 대학생 제자들로 가득하다.
신 교수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1962년 서울 무학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와 대광중학교에 잇따라 합격했지만 평생 정치판만 떠돌던 아버지는 맏아들(申同秀 대구시 정무부시장) 이외는 신경쓰지 않았다.
4남4녀중 셋째 아들인 신 교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자 고향인 충남 부여로 내려가 농사일을 거들다 무작정상경,메리야스공장과 자동차 정비공장 등을 전전했고 66년서울 돈암동에 있는 제과점 ‘태극당’에 취직했다.
그는 “처음에는 케익에 생일이나 축하합니다 등의 영어 철자를 틀리게 써 선배들에게 숱하게 야단을 맞았다”고 회고했다.그렇게 10년 동안 제과기술을 배워 부공장장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얼마 뒤 서울 강남에 자신의 제과점을 냈다.그러나첫 제과점은 불이 나 망했고 인근에 다시 차렸지만 장사가 안돼 빚만 진 채 문을 닫았다.
실의에 빠진 그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는 등 잠시 ‘외도’를 고려했지만 결국 제과점으로 돌아왔다.
“친구인 사장 밑에서 점원으로 일했지만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편했다”는 그는 86년 12월 성심당제과점의 공장장을맡아 대전으로 내려왔다.97년 현재의 학원을 차리고 독립할때까지는 그가 구워낸 빵 맛은 대전지역에서 최고를 자랑했다.그는 92년 노동부가 주관하는 ‘제과기능장’ 시험에서국내에서 처음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그리고 이 합격증은 97년 국내 명문대 출신과 프랑스 등 해외유학파 등을제치고 우송공업대 교수로 채용되는 발판이 됐다.
신 교수는 “98년부터 가르친 제자들이 직장을 구했다며 찾아올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며 “부지런히 일을 하면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글 대전 이천열기자 sky@
2001-02-20 21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