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여진족이 한족(漢族)을 다스린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淸)나라의기틀을 다진 강희제(康熙帝)와 그의 넷째아들 옹정제(雍正帝)는 여러면에서 대조적이다. 강희제는 관대한 정치를 편 인간적인 군주인 반면 옹정제는 가장 양심적인 독재군주였다.어느 쪽이 바람직한 통치자의 길일까.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와 일본의 동양사학계 거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가 쓴 전기 ‘강희제’와 ‘옹정제’(이상 이산)는 그 장단점을 음미하게 해준다.
강희제는 병자호란 25년 후인 1661년 만7세 때 즉위해 무려 61년동안국경을 넓히고 인두세를 동결하는 등 화려한 업적을 쌓은 덕에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다.자식 문제만이 골칫거리였다.
자녀 56명 중 절반이 성인이 되기 전에 숨졌다.유일한 적자인 둘째를 2세 때 황태자로 책봉했으나 관료들에게 둘러싸여 정치보스로 크면서 안하무인이 되는 바람에 두차례나 폐위시켜야 했다.
옹정제(雍正帝)는 45세 때 제위에 올라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이다.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실천했다.13년동안 새벽4시부터 밤12시까지 일하며 초인적인 정력으로 의지를 펴나갔다.
백성들의 고통 위에서 관료들이 명성과 실익을 동시에 누리는 보스정치와 부정부패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영향력이 큰 정치보스들을제거하고 새 인재들을 발탁했다.밀정을 통해 관료들을 감시하며,관료들과 천자가 직접 의견을 주고받는 주접(奏摺)제도를 적극 활용했다.매일 수십통을 읽고 답장을 써야 했다.신하의 알현 신청은 거절하고 편지를 쓰도록 했다.
강희제는 먼 곳까지 원정과 사냥을 즐겼으나 옹정제는 하루만 쉬어도일이 밀리기 때문에 베이징 밖으로 나가볼 여유가 없었다.지방관들에게 근무지 수당인 양렴은(養廉銀)을 주되 그 외에는 한푼도 취하지못하도록 했다. 여론이란 유력자들의 이익 대변에 불과하다며,명령을내릴 때 도리에 맞는지만을 생각했다.황태자도 일찍 책봉하지 않았다.그러나 천하의 모든 일을 황제 혼자서 책임지고 처리하는 방식은옹정제가 아니면 불가능했다.그가사망하자 관대한 정치가 되살아났다.옹정제의 개혁 덕택에 청조는 100년이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독재도 잘만 하면 좋은 정치가 될 수 있겠지만,선의의 독재를 경험한대중은 독재가 아니면 다스려질 수 없도록 틀지워진다는 역설적인교훈을 저자는 도출해낸다.
김주혁기자 jhkm@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와 일본의 동양사학계 거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가 쓴 전기 ‘강희제’와 ‘옹정제’(이상 이산)는 그 장단점을 음미하게 해준다.
강희제는 병자호란 25년 후인 1661년 만7세 때 즉위해 무려 61년동안국경을 넓히고 인두세를 동결하는 등 화려한 업적을 쌓은 덕에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다.자식 문제만이 골칫거리였다.
자녀 56명 중 절반이 성인이 되기 전에 숨졌다.유일한 적자인 둘째를 2세 때 황태자로 책봉했으나 관료들에게 둘러싸여 정치보스로 크면서 안하무인이 되는 바람에 두차례나 폐위시켜야 했다.
옹정제(雍正帝)는 45세 때 제위에 올라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이다.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실천했다.13년동안 새벽4시부터 밤12시까지 일하며 초인적인 정력으로 의지를 펴나갔다.
백성들의 고통 위에서 관료들이 명성과 실익을 동시에 누리는 보스정치와 부정부패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영향력이 큰 정치보스들을제거하고 새 인재들을 발탁했다.밀정을 통해 관료들을 감시하며,관료들과 천자가 직접 의견을 주고받는 주접(奏摺)제도를 적극 활용했다.매일 수십통을 읽고 답장을 써야 했다.신하의 알현 신청은 거절하고 편지를 쓰도록 했다.
강희제는 먼 곳까지 원정과 사냥을 즐겼으나 옹정제는 하루만 쉬어도일이 밀리기 때문에 베이징 밖으로 나가볼 여유가 없었다.지방관들에게 근무지 수당인 양렴은(養廉銀)을 주되 그 외에는 한푼도 취하지못하도록 했다. 여론이란 유력자들의 이익 대변에 불과하다며,명령을내릴 때 도리에 맞는지만을 생각했다.황태자도 일찍 책봉하지 않았다.그러나 천하의 모든 일을 황제 혼자서 책임지고 처리하는 방식은옹정제가 아니면 불가능했다.그가사망하자 관대한 정치가 되살아났다.옹정제의 개혁 덕택에 청조는 100년이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독재도 잘만 하면 좋은 정치가 될 수 있겠지만,선의의 독재를 경험한대중은 독재가 아니면 다스려질 수 없도록 틀지워진다는 역설적인교훈을 저자는 도출해낸다.
김주혁기자 jhkm@
2001-01-31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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