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잔’이인성 회고전

‘한국의 세잔’이인성 회고전

입력 2000-11-20 00:00
수정 2000-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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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화가 이인성(1912∼1950).한국근대미술의 도입기이자 성장기인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그는 어느 누구보다 걸작을 많이 남긴 작가였다.조선미술전람회는 이인성을 위한 무대라고 할 만큼 일제 식민지 시대에 그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하지만 이인성에 대한 평가는엇갈린다.그가 추구한 ‘조선 향토색’은 일제가 조장한 지방색의 일환이었다는 비판이 있는가하면,관전(官展)을 중심으로 활동한 그의경력이 ‘출세지향적이고 타협적인 작가’라는 멍에를 안겨주기도 한다.뚜렷한 자기 양식을 확립하지 못한 절충주의 작가라는 지적도 따른다.화가로서의 이인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올해는 그가 서거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에 맞춰 삼성미술관이마련한 ‘근대화단의 귀재 이인성-작고 50주기 회고전’(2001년 1월25일까지)은 그의 예술적 성과와 한계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자리다.전시장인 서울 호암갤러리에는 수채화,유화,드로잉 등 90여점이 나와 있다.조선미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은 ‘경주의 산곡에서’(1935년)를 비롯해 ‘가을 어느날’(1934),‘복숭아’(1939),‘카이유’(1932),‘아리랑 고개’(1934) 등 대표작들이 망라됐다.작가가 19살 때 그린 수채화첩도 처음 공개됐다.

대구에서 태어난 이인성은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거의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했다.

이인성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국적 인상주의’를토착화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그는 1930년대 초 한국 고미술 연구가로 잘 알려진 시라카미 쥬요시의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서구미술의 후기 인상주의 기법을 익혔다.고흐,고갱,마티스,세잔 등의 인상주의는 그를 포함한 일본유학파들에 의해 한국화단에 흘러들었다.이인성은 이 서구사조를 나름의 주체적 화풍으로 소화했다.후기인상주의를조선의 향토색 내지 향토적 서정주의로 승화해 토착화시킨 것이다.그의 화풍은 ‘이인성류’로 발전해 근현대 한국미술의 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이인성은 20여년의 길지 않은 화력을 뜨겁게 불태웠다.하지만 그의죽음은 너무 어처구니없었다.한국전쟁 와중인 1950년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순경과벌인 사소한 시비 끝에 순경의 총기 오발로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소설가 최인호는 그의 최후를 각색한 에세이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에서 순경이 이인성의 이마에 총구를 겨냥한채 방아쇠를 당겼다고 묘사했다.

김종면기자
2000-11-2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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