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생 만난 이호철씨.
“이산의 아픔을 담은 소설을 쓰겠습니다” 8·15 남북이산가족 교환 방문단 민간 지원 요원으로 북한에 다녀온소설가 이호철(李浩哲·68)씨는 18일 오후 김포공항에서 북한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절절한 심정을 소설로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이를 위해 이씨는 조만간 북한 방문 일정과 메모를 정리, 집필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분량이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이씨의 소설은 여동생과 만난 이씨의 경험과 다른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한,북한의 변화한 모습,분단 반세기만의 소회,통일의 바람 등을포함한 ‘통일 소설’이 될 것으로 보인다.
원산이 고향인 이씨는 6·25당시 혈혈단신으로 남으로 내려왔다.이번 상봉에서는 일정에도 없던 열 살 아래의 여동생 영덕씨(58)를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남동생 호열씨(64)는 중풍으로 쓰러져 만나지 못했다.
◆ 어머니 만난 장가용 박사 .
“돌아가신 아버지 장기려(張起呂)박사는 ‘모든 이산가족들이 가족을 만나기 전에는 나도 만날수 없다’며방북신청을 거부했지만 저는 어머니(김복숙·90)를 보고싶은 마음을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방북 일정을 마치고 18일 돌아온 장가용(65) 서울의대 교수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님을 만났다는 기쁨과 이제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방북신청에서 400명에 들지 못했을 때 얼마나 속이 상하고 화가나던지.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다른 이산가족들도 다 마찬가지더라구.
아버님도 이런 뜻에서 끝까지 방북을 거부하셨구나 싶더라구요” 다행히 대한적십자사의 배려로 방북단의 의료책임자로 평양에 간 장교수는 “미국에 사는 교포를 통해 어머니 사진을 보긴 했지만 50년만에 직접 뵌 어머니는 생각보다 훨씬 고운 모습이었다”며 “구순의나이치고는 몸 건강도 괜찮아 보여 한시름 놓았다”고 말했다.
그리던 어머니였지만 어머니는 말수가 적었다.
“이게 꿈이에요,생시에요” “어머니,이놈아 하고 나무라셔야지 왜 존대를 하십니까” 평소 아랫사람에게도 철저히 존대를 했던 어머니였기에 오랜만에 만난 장교수에게도 무심결에 존대를 했다.
18일아침 평양을 떠나기 전 30분동안 가족을 만났을 때 어머니는말문이 트였다.
어머니는 30분내내 “이제 가면 언제오냐”며 손을 놓지 못하셨고장교수는 “1∼2년내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테니 그때까지 몸 건강히 살아계세요”라며 기약없는 약속을 했다.갑자기 전쟁전 열식구 수발하시느라 고생만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겹쳤다.평양 최고의 명문이던 서문고녀를 나오고도 꼿꼿한 남편을 만나 갖은 고생 다하신 어머니.어린시절 뛰어놀던 대동강은 강폭이 3배나 넓어졌고 평양 시내도옛모습은 간데 없었지만 어머니는 그대로 남아있었다.동생들은 오빠가 어머니를 빼닮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번에 100명씩 만나면 앞으로 700번을 만나야 이번에 신청한 사람들이 다 만날 수 있어요.그분들 언제 돌아가실줄도 모르는데 하루빨리 ‘만남의 광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장교수는 국에 든 고기가 가로 세로 1∼2㎝크기로 반듯하게 썰려 있는걸 보고 북한의 ‘힘’을 느꼈다고 전했다.온갖 재료를 듬뿍 넣은남한 음식에 비하면 소꿉장난 같았지만 부족한 물자로 최선을 다하는모습에서 자신감을 엿보았다.
장교수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평생을 인술을 펴는데 보낸아버지의 뜻을 이어 북한에서 자신의 의료기술을 베풀 기회를 갖길원했다.
김재천 류길상기자 patrick@
“이산의 아픔을 담은 소설을 쓰겠습니다” 8·15 남북이산가족 교환 방문단 민간 지원 요원으로 북한에 다녀온소설가 이호철(李浩哲·68)씨는 18일 오후 김포공항에서 북한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절절한 심정을 소설로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이를 위해 이씨는 조만간 북한 방문 일정과 메모를 정리, 집필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분량이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이씨의 소설은 여동생과 만난 이씨의 경험과 다른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한,북한의 변화한 모습,분단 반세기만의 소회,통일의 바람 등을포함한 ‘통일 소설’이 될 것으로 보인다.
원산이 고향인 이씨는 6·25당시 혈혈단신으로 남으로 내려왔다.이번 상봉에서는 일정에도 없던 열 살 아래의 여동생 영덕씨(58)를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남동생 호열씨(64)는 중풍으로 쓰러져 만나지 못했다.
◆ 어머니 만난 장가용 박사 .
“돌아가신 아버지 장기려(張起呂)박사는 ‘모든 이산가족들이 가족을 만나기 전에는 나도 만날수 없다’며방북신청을 거부했지만 저는 어머니(김복숙·90)를 보고싶은 마음을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방북 일정을 마치고 18일 돌아온 장가용(65) 서울의대 교수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님을 만났다는 기쁨과 이제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방북신청에서 400명에 들지 못했을 때 얼마나 속이 상하고 화가나던지.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다른 이산가족들도 다 마찬가지더라구.
아버님도 이런 뜻에서 끝까지 방북을 거부하셨구나 싶더라구요” 다행히 대한적십자사의 배려로 방북단의 의료책임자로 평양에 간 장교수는 “미국에 사는 교포를 통해 어머니 사진을 보긴 했지만 50년만에 직접 뵌 어머니는 생각보다 훨씬 고운 모습이었다”며 “구순의나이치고는 몸 건강도 괜찮아 보여 한시름 놓았다”고 말했다.
그리던 어머니였지만 어머니는 말수가 적었다.
“이게 꿈이에요,생시에요” “어머니,이놈아 하고 나무라셔야지 왜 존대를 하십니까” 평소 아랫사람에게도 철저히 존대를 했던 어머니였기에 오랜만에 만난 장교수에게도 무심결에 존대를 했다.
18일아침 평양을 떠나기 전 30분동안 가족을 만났을 때 어머니는말문이 트였다.
어머니는 30분내내 “이제 가면 언제오냐”며 손을 놓지 못하셨고장교수는 “1∼2년내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테니 그때까지 몸 건강히 살아계세요”라며 기약없는 약속을 했다.갑자기 전쟁전 열식구 수발하시느라 고생만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겹쳤다.평양 최고의 명문이던 서문고녀를 나오고도 꼿꼿한 남편을 만나 갖은 고생 다하신 어머니.어린시절 뛰어놀던 대동강은 강폭이 3배나 넓어졌고 평양 시내도옛모습은 간데 없었지만 어머니는 그대로 남아있었다.동생들은 오빠가 어머니를 빼닮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번에 100명씩 만나면 앞으로 700번을 만나야 이번에 신청한 사람들이 다 만날 수 있어요.그분들 언제 돌아가실줄도 모르는데 하루빨리 ‘만남의 광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장교수는 국에 든 고기가 가로 세로 1∼2㎝크기로 반듯하게 썰려 있는걸 보고 북한의 ‘힘’을 느꼈다고 전했다.온갖 재료를 듬뿍 넣은남한 음식에 비하면 소꿉장난 같았지만 부족한 물자로 최선을 다하는모습에서 자신감을 엿보았다.
장교수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평생을 인술을 펴는데 보낸아버지의 뜻을 이어 북한에서 자신의 의료기술을 베풀 기회를 갖길원했다.
김재천 류길상기자 patrick@
2000-08-19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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