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장] ‘왕따’ 학습사회

[대한광장] ‘왕따’ 학습사회

김명숙 기자 기자
입력 2000-03-23 00:00
수정 2000-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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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TV를 통해 방영된 중학교 교실내 ‘왕따 만들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현장이 생생하게 녹화되었기 때문이다.학생들에게 미리 비디오 설치를 알려주었는데도 아이들은 그들의 생활 그대로를 보여주었다.‘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그 아이의 표현을그대로 빌리자면 ‘왕처럼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이자 ‘평화파’였다.다른아이들은 모범생을 빗댄 말로 ‘범생’이라고 표현했다.이를 통해서도 알수 있듯이 ‘왕따’를 당하는 이유인즉 그가 준법주의자이거나 남의 가학적행동에 대항하지 않는 무저항주의자이기 때문이었다.더욱 놀라운 것은 가장친한 아이가 가장 많이 괴롭히고 있었다는 점이다.그 이유는 그래야만 자신이 ‘왕따’를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왕따’만들기는 어느새 우리 아이들에게 사회화의 한 단면이 되어가고 있었다.사회화란 보통 사람들의 생활규범을 배우고 내재화하는 무의식적 학습과정이다.그렇다면 한국에서 사회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한마디로그것은 영악스러워지는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탈법을 생활화하고,그러면서 법망에 걸리지 않는 것을 배워 나가는 것이 우리 사회의 학습과정일지도모른다.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밟고서라도 뒤지지 않는 기술을습득하는 것,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도(正道)를 밟는 준법주의자를 집단적으로 망신주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래야만 자신의 외도(外道)를 교묘히 감추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취재진과 연구팀은 녹화된 장면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집단가해자로서자신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본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떨구었다.그것은 실로가슴 아픈 장면이었다.가해자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가해자였던 그 아이들 속에 무언가 집단적 강박관념과 스트레스가 응어리져 있었던 것이다.자신들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그들은 속죄양을 만들고 있었다.한편으론 언젠가 자신도 ‘왕따’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서.어쩌면 그들은 과잉경쟁으로 인한 준칙없는 과속주의에 멍들어 가고 있는지도모른다.

그것은 아이들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그러한 변칙적 질서를 만들어 모방케 한 어른들의 책임이고 한국사회의 하나의 작은 모형이다.변화가 빠른 사회는 늘 ‘적자생존’의 다위니즘이 사회의 지배원리가 된다.이 과정에서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열외로 도태되고 그 도태자가 능력이 모자란것이 아니라 원칙을 따랐을 때는 집단따돌림을 당하게 된다.일본의 급속한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무라하치부(村八分:마을의 법도를 어긴 사람을 마을사람들이 함께 따돌리는 일)의 관행이 생긴 것이나 우리의 ‘왕따’만들기나모두 사회변화와 무관하지 않다.해외에서 돌아온 우리 주재원들은 특히 우리국민들이 IMF 이후 더욱 영악스러워지고 있어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렵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권위주의적 사회가 급속한 변화를 겪으면서 아도르노가 말한 극단적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우리의 고질적 지역감정도 그러한 사회현상의 일면일 수도 있다.많은 돈을 쓰면서 정치의 일선에나서고 있는 사람들도 준칙이 무시되는 사회에서 남보다 훨씬 큰초법적 영향력을 갖고 싶어 무모한 경쟁을 벌이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영국도 회복에 8년이나 걸렸다는 IMF의 터널을 너무도 빠르게통과하는데 따른 어떤 증후군들을 돌아보아야 한다.그것은 생산적 복지라는이름하에 경쟁에서 뒤진 숨은 낙오자들을 일으켜 세워 격려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내몰았던 그 경쟁의 규칙과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변칙적 질서를 바로 세우고 ‘범생’을 ‘왕따’로 둔갑시키는 사회학습을 근절하는 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헤쳐나와야 할터널이다.그 터널을 통과해야 우리는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다.

김명숙 상지대교수 정치학.
2000-03-23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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