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장] 지혜로운 목자

[대한광장] 지혜로운 목자

일철 기자 기자
입력 2000-01-08 00:00
수정 2000-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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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33년.그 긴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우리 겨레,우리 민족이 서기 2000년이라는 능선에 서서 ‘새 천년’을 너나없이 들뜬 마음으로 노래 부르는까닭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저 삼각산 아래 세종로를 지나 을지로로 청계천으로 신호등과 건널목,횡단보도를 무시한 채 삶과 죽음 사이를 곡예하듯 질주하는 차량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숨가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떨쳐버리고 싶은 현실에 대한또다른 기대치는 아닌지.1999년 세밑까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여인네들과 정치권력이 뒤얽힌 옷로비사건으로부터 하루바삐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이 지어낸 허튼 구호는 또 아닌지.

자고 나면 변화하는 정치적 이합집산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새해에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희망가를 부르듯 ‘새 천년’이 왔다고 목이 터지도록,귀가 따갑도록 부르짖는 것은 진정 아닐는지.

97년 외환위기를 맞아 굴욕적인 IMF 구제금융을 받은 아픔이 채 가시지도않은 이때에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기업들이 헐값으로 외국자본에팔려나가고 있는 이러한 상황에 ‘새 천년’의 구호를 내걸고 거창한 행사를 치르는 두둑한 배짱을 가진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세상이 어지럽고 앉은 자리가 불안할수록 사람에겐 긴 호흡과 사려깊은 생각이 필요한 법.새로운 것을 찾아 혈안이 된 채 분주하게 앞만 보고 치닫는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의 삶을 뒤돌아보게 할 사려깊음은 지혜의 샘에서 솟아나온다.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꾸며 내면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의 물은 마르지 않는 진리의 숲에 가득 차 있다.

2,600여년 전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머무실 때 다음과 같은 비유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마가다국에 두 사람의 소치는 목자가 있었다.그중 한 사람은 어리석었으나 다른 한 사람은 지혜로웠다.많은 소떼를 거느린 두 사람은 우기(雨期)를맞아 먹이가 풍부하고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갠지스강을 건너고자 했다.

그런데 어리석은 목자는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을 잘 관찰하지도 않고,물살의 빠르고 약함이나 깊고 낮음도 살피지 않고 한꺼번에 소떼를 몰아 강을 건너게 했다.그의 소떼는 강물 한가운데 이르자 거센 물살에 휩쓸려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왜냐하면 그는 강물의 상태를 살피지도 않은 채 무모하게 강을건너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목자는 소떼를 강물로 밀어넣기 전에 여러가지 상태를 잘관찰하였다. 우선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을 잘 살펴서 강폭이 좁으면서도 물살이 완만하고 깊지 않은 곳을 도하(渡河)지점으로 선택을 했다.그리고 소떼가운데 비교적 힘이 세고 길이 잘 들여진 놈을 먼저 강물에 넣어 저쪽 언덕에 이르게 했다.이어 암소를 건너게 한 뒤 다시 중간 소와 송아지들을 건너게 했다.송아지들은 이미 어미 소를 보며 용기를 얻어 무사히 강을 건넜다.

수행자여,사람들도 이와 같다.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잘 관찰하지도 않고 건너는 장소나 방법도 모르는 법이다.그들을 믿고 강을 건너려 하다가는 오히려 불행을 면치 못한다.그러나 바른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이쪽 저쪽을 잘 살펴 건널 곳과 물살의 깊이를 헤아리며,적절한도하방법도 알고 있는 까닭에 다른 이들을 안전하게 행복의 언덕에 도달할수 있게 한다.그렇다면 어떤 이가 지혜로운 사람인가.탐(貪)·진(嗔)·치(癡) 삼독을 끊고 올바른 진리를 깨달아 성취한 사람이다.” 남을 가르치거나 이끄는 위치에 선 사람은 서 있는 자리의 무게만큼 책임이따르는 법. 현명한 판단과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없을 때, 그를 믿고 뒤를따르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나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단기 4333년 새해에는 지혜로운 이가 이웃이 되어 어리석은 이의 좋은 친구로 혹은 스승으로 늘 우리와 함께하기를 기원해 본다.

一 徹 조계종 문화부장
2000-01-08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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