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언내언] 어느 學兵의 편지

[외언내언] 어느 學兵의 편지

임춘웅 기자 기자
입력 1999-06-26 00:00
수정 1999-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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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아마 열명은 될것입니다.네명의 특공대원들과 함께 수류탄을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제가 사람을 죽이다니요.어머니.무섭습니다.지금 내 옆에는 여러 전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듯이 적들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엎드려 있습니다.

어머니.오늘 제가 죽을지도 모릅니다.저 많은 공산군이 그냥 물러갈것 같지 않습니다.어머니도 동생들도 다시 못만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무서워집니다.

어머니.살고 싶습니다.천주님은 우리 어린 학병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어머니.꼭 살아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편지는 1950년 8월 육군 제3사단에 편입되어 포항전투에 투입됐던 학병이우근(李佑根)군이 쓴것이다.그는 당시 18세로 서울 동성중 5학년때 ‘6·25’를 맞았고 곧 군을 따라 피난가다 대구에서 학병으로 참전하게 됐었다.

꼭 살아서 어머니 앞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이군은 편지를 쓰던 날 전사했다.이군은 이 편지를부치지 못한채 주머니 속에 넣고 전투에 나섰던 모양이다.전우들이 총에 맞은 이군을 업고 대대본부로 돌아왔을때 이군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전우들이 상의 주머니에서 꺼낸 편지는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고 한다.군번도 계급도 없이 교복을 입은채 총을 잡았던 소년 이군이 “어머니”를 부르며 전사한지 올해로 49주년이 됐다.‘6·25’가 없었다면 이군은 지금 67세의 정정한 노인으로 여생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시인 김지하(金芝河)씨가 회고하는 ‘6·25’도 참으로 비극적이다.그때 겨우 열살이었던 어린 소년은 숙부가 좌익에 의해 총살장으로 끌려가던 날 밤,백부는 월출산에 빨치산으로 입산하기 위해 할머니를 찾아 인사온것을 보았었다고 한다.

그는 또 영산강 변두리에 있던 작은마을로 피난가 있었을때 좌익동네 사람들이 대낮에 옆의 우익동네 마을로 몰려가 우익동네 전직 경찰관의 어린 아기를 몽둥이로 마치 개를 잡듯이 때려죽이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고 회고한다.

‘6·25’를 직접 겪어보지 못한 세대는 남북문제가 왜 이렇게 복잡하고 엉뚱한지 이해하기 힘들것이다.서해 교전이나 금강산 관광객 억류 사건이 다이처럼 참혹했던 ‘6·25’의 깊은 상처와 연관돼 있는 것이다.

임춘웅 논설위원
1999-06-26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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