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공화국과 張勉] (3) 경제개발 5개년계획(上)

[제2공화국과 張勉] (3) 경제개발 5개년계획(上)

이용원 기자 기자
입력 1999-03-05 00:00
수정 1999-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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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勉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단군 이래 첫 종합국토개발계획이었고 5·16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큰 성과를 거두었다.하지만 이 사업은 더욱 큰프로젝트의 서막일 뿐이었다.‘경제 제일주의’를 내건 장면정부의 청사진은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년)에 집약돼 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라면 흔히 朴正熙정권의 전유물처럼 여긴다.그 전에는 우리 사회에 경제개발이란 개념조차 없었다거나 있다손치더라도 경제관료들이 이를 구상하고 기획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고들 믿는다.이는 쿠데타세력이 5·16 직후 일관되게 이같은 주장을 편 데다 박정희시대 18년 동안 모든공식적인 문서를 저들 뜻대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개발계획을 박정희 때 처음 만들었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장면정부는 ‘완성된’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갖고 있었다.다만 발표 직전 쿠데타를 당해 국민에게알릴 기회를 놓쳤을 따름이다.

장면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일부 수치만 바뀐 채 골격이 쿠데타 세력에게 넘어갔고,군사정권은 이를 자신의 작품인 양발표한 뒤 그대로 실천했다.따라서 60년대 경제성장의 밑그림은 장면정부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개발계획이 처음 등장한 때는 자유당정권 말기였다.李承晩정권의 강압정치에 실망한 미국은 1957년 중반 金顯哲 부흥부장관에게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내놓아야 원조를 계속하겠다고 통보했다.마침 국내의 일부 젊은 경제관료들도 장기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구미에서 경제·행정 부문 선진이론을 배우고 귀국해 행정부의 실무책임자로서 국가 발전에정열을 불태우던 그룹이다.

劉彰順(미 헤이스팅스대) 李漢彬(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車均禧(미 위스콘신대 경제학박사)丁渽錫(미 밴더빌트대 경제학과) 崔昌洛(〃대학원 경제학과) 鄭韶永(미 워싱턴주립대 경제학박사) 등이 대표적인 이들로 모두 훗날경제부서 장관을 역임한다.

李起鴻(77·전 월간 ‘코리아 비지니스 월드’발행인)은 당시 부흥부 기획과장이었다.미 컬럼비아대 경제학 석사인 그는 세계적인 석학 넉시 교수에게서 경제개발 이론을 배웠다.넉시는 ‘경제개발’ ‘개발도상국’ 같은 개념을 처음 도입한 학자이다.

미국이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요구하자 이기홍은 밤샘을 거듭하며 그 개요를 만든다.그러나 이때의 경제개발안은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묵살된다.57년11월 경제 4부 장관들이 함께 경무대로 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필요성을설명하자 이승만은 “그것은 스탈린 사고방식 같은데….불구대천의 원수인공산주의자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냐”며 한마디로 거절한다.(이기홍 회고) 이후 宋仁相이 부흥장관으로 취임하면서 경제개발계획은 은밀하지만 활발하게 추진된다.宋장관은 한국은행 부총재 시절 세계은행 부설 경제개발연구소(EDI)에서 연수를 받은 터라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회고록에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경제발전 목표를 설정하고,그 달성을 위해 나라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 당시)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宋장관과 이기홍과장은 미 대외원조처(USOM) 간부들과 협의해 장기경제개발계획을 마련할 조직인 산업개발위원회(EDC)를설립했다.세계적으로 경제개발위원회라고 통용되는 기구지만 국내에서는 ‘경제개발’이란 개념이 생소하다는 이유로 산업개발로 이름붙였다.

산업개발위원회(산개위)는 58년 4월1일 부흥부장관 자문기관으로 출범했다.

초기에는 송장관이 위원장을 겸임했다.위원은 22명이었지만 고문과 보좌요원을 두도록 해 당대의 최고 전문가들을 두루 끌어들였다.비용은 전액 미국에서 제공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났다.예컨대 부흥부의 연간 운영예산이 9,600만환인 데 견줘 산개위는 6,000만환이었다.봉급도 높아 연구원 평균 월급이국무위원(4만2,000환)보다 많은 5만환 정도였다.

산개위는 59년 봄 ‘경제개발 3개년계획’(1960∼1962년)을 국무회의에 내놓는다.그러나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던 이승만정부는 1년이 지나도록 심의조차 하지 않다가 60년 4월15일에야 승인한다.마산에서 金朱烈군의 시신이 발견돼 2차시위가 일어난 지 나흘 뒤,4·19혁명이 일어나기 나흘 전이었다.아마 흉흉해진 민심을 가라앉히는 수단으로 내세운 듯하다.자유당정권이 이처럼 경제개발에 늑장을 부린 데 대해 이한빈은 그의 논저에서 “한국 사회를위하여 커다란 불행이었고 한 토막의 역사의 풍자”라고 비판했다.

4·19혁명∼許政과도정부∼장면정부 출범이라는 격변 속에서도 산개위는 장기경제개발계획을 마련하는 본연의 임무를 꿋꿋이 수행했다.장면정부는 출범한 지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60년 9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정부시책으로 채택한다고 공표했다.

이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자유당정권의 ‘3개년계획’을 토대로 하되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닌 별개의 것이었다.산개위에서 ‘3개년계획’과 ‘5개년계획’을 작성하는 데 실무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金立三전경련고문(77)의설명은 다음과 같다.

“거시적인 면에서 3개년계획은 산업 각 부문을 고루 발전시킨다는 ‘균형성장이론’에 토대를 둔 반면 5개년계획은 특정 부문에 투자를 집중해 전체적인 성장을 이끌어가는 ‘전략 부문 중점투자’이론을 채택했다.작성 방법도 전혀 달라 5개년계획은 노동력은 풍부하면서 자본이 부족한 나라에 적합한 새 모델을 적용했다.” 자유당정권의 계획과 장면정부의 계획이 이처럼 달라진 이유를 金고문은 “선진이론을 꾸준히 연구해 우리 실정에 맞게끔 다듬어 나간 데다 정부의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산개위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새로 만드는 동안 장면정부는 경제개발의 성패를 좌우하는 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60년 9월 장면총리 명의로 크리스천 허터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에이드 메모아르(일명 Economic Reform Measures in Korea)는 당시 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개발 계획 당시 부흥부 기획국장 李起鴻씨 李起鴻씨는 1956년 12월 부흥부 기획과장으로 출발해 장면정부에서는 부흥부 기획국장을 역임했으며 63년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공직을 마감했다.그 7년동안 경제개발 계획의 큰 틀을 짜고 방향을 제시하는 주역 노릇을 했다.

61년 5월 기획국장인 그는 李漢彬 재무부 예산국장,金泳祿 재무부 이재국장과 함께 워싱턴에 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미 정부에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다가 5·16쿠데타 발생 소식을 들었다.

李전차관보는 “그해7월 張勉총리가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돼 있었다”면서 회담에서 지원을 요청하기에 앞서 미국측 의사를 확인해 보려고 실무교섭단으로 미리 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 관리들이 우리가 가져간 제1차 5개년계획 시안을 보고 ‘구매품목 표’라고 놀리듯 말하긴 했지만 상당한 호의를 갖고 격려해 주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5개년계획에 필요한 재원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귀띔을해줘 다시 한번 장면정부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엿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李전차관보는 “5개년계획이 어떻게 작성되었으며 집행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아직 없다”고 개탄하면서 朴正熙정권의 왜곡사례를 들었다.

60년대 말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미 하버드대의 콜 박사와 합작으로 한국경제발전사를 기술했는데 5개년계획의 작성 배경이나 장면정부의 경제시책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62년 1월 군정이 선포한 5개년계획의 구성과 방향만을 논했다는 것이다.

그 후 80년대에 콜 박사를 자주 만나게 돼 “장면정부의 5개년계획을 포함하지 않고서 어찌 공정하고 객관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그러자 콜 박사가 “5개년계획이 장면정부에서 상당히 진척된 것은 알지만 기록이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면서 거꾸로 “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느냐”고 공격하더라는 것이다.

李전차관보는 “국가연구기관인 KDI가 집권층인 군 출신들의 눈치를 보지않을 수 없어서 그랬을 테지만 학문적 양심을 저버린 것은 분명하다”고 비판했다.그런 한편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5개년계획을 박정희정권 때 시작한 것으로 아는 데는 나처럼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은 탓이크다”는 깨달음도 얻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李전차관보는 경제개발계획,국토건설사업 등 장면정부의 경제정책에 관한 자세한 소개도 곁들인 회고록 원고를 최근 마무리지었다.그 내용은 ‘경제 근대화의 숨은 이야기’(보이스 간)라는 제목으로 이달 안에 출판될 예정이다.李容遠
1999-03-05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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