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늘 권력을 잡은 자의 기록이 되기 쉽다.권력자는 때로 역사를 왜곡해 왔다.그 결과 세계사의 적지 않은 부분이 정직하지 못한 역사로 얼룩져있다.한국의 현대사도 독재권력에 의해 왜곡됐다.그러나 엄혹한 독재상황에서도 민족의 일그러진 역사현실을 극복해 보려는 의식있는 지식인들의 행동은 끊이지 않았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을 낸 것도 진실을 밝혀 역사의 시계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데 작은 동력이 되고자 하는 시도였다.송건호 선생 등 12명이 쓴 이 책은 1979년 10월 15일 한길사에서 펴냈다.당시 시대상황에서 이러한 책을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독재권력은 해방후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그러나 어려운 시대의 어둠을 논리적으로 밝히는 일이 필요했다.올바른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을 내기로 했다”고 그 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송건호 선생은 ‘8·15의 민족사적 인식’이라는 글에서 분단의 비극을 안타까와 했다.민족의 비극이분단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분단의 현실은 극복의 대상이었다.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남북갈등과 막강한군사력의 대립으로 언제 또 6·25보다 더 파괴적인 동족상잔이 빚어질지 모르는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민주주의는 시련을 겪고 민족의 에너지는 새로운 군사력을 위해 소모 되고 있는 암담한 상황이 이른바 해방된 이 민족의 현실이다”. 그는 친일파가 다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는 부끄러운 현실과 분단을 권력유지에 이용하는 독재권력을 비판했다.“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는 또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러한 여건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라며 대중이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송건호 선생의 글을 비롯한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해방후 역사현실을 식민사관이나 독재권력의 ‘분단고착화’ 시각으로 보지 않고 분단을 악용하는독재권력,친일파 숙청작업의 좌절 등 해방전후의 역사적 사실과 그 전개과정을 사실적으로 썼다.그것은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역사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이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세상에 나올 때는 유신독재가 말기현상으로 사회적 긴장과 불안을 고조시키며 비극적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책이 나온 다음날 부마사태가 터졌다.유신정권의 억압이 한계상황에 도달한 것이다.불안한 긴장 속에 책은 빠르게 팔려나갔다.열흘만에 초판 5,000부중 4,500부가 팔렸다.사회과학서적이 그것도 500쪽이 넘는 책이 이처럼 폭발적으로 팔린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유신독재가 10월26일 궁정동의 총성으로 비극적인 막을 내리며 이책도 비운을 맞았다.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출판물이 군의 검열을 받게됐다.당연히 군 당국은 이 책을 판매금지시켰다. 김언호 대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79년 10월 28일 문공부로호출됐다.‘당신을 구속해야 하지만 처음이니까 관용을베풀겠소.다시는 이런 책 내지 마시오’라고 계엄사에서 파견된 한 문관이 말했다”. 판매금지 사유는 현실 왜곡·부정이었다.그러나 현실을 왜곡한 것은 책이아니라 독재권력이었다.역사를 제대로 보자는 책을 현실 왜곡·부정이라는억지 이유로 ‘금서’로 규정하는 현실은 일그러진 현대사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었다. 이 책은 80년 ‘서울의 봄’이라는 짧은 민주주의 실험때 판매금지에서 해제됐다.민주주의 실험은 강경 군부의 등장으로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냈다.그러나 ‘광주의 비극’과 그 이후의 민주화투쟁은 민주주의라는 찬란한 결실을 맺었다.80년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이 책은 대학생들이 올바른 역사인식에 눈을 뜨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많은 대학생들이 이 책을 찾았다.베스트셀러가 됐다.80년대 30만부나 팔렸다”고 김언호 대표는 말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1970년대는 민족적 자각이 지식인 사회에서 크게 고양되는 시대였다.깨어있는 지식인들은 한반도의 모든 비극의 근원적 원인은 민족의 분단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분단현실은 남북의 군사대결로 우리 민족의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들었다.친일파들은 반공이데올기라는 가면을 쓰고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복귀했다.친일파와 기회주의자들이 활개치는 현상은 민족의 양심을 파괴하고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독재권력은 분단을 권력유지에 악용했다.독재로 민주주의는 꽃피지 못했다.의식있는 지식인들은 친일파와 독재권력이 이러한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것을 분단으로 합리화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책이라고 할수 있다.독재정권은 집권동안 이러한 역사인식을 박제하여 낡은 역사의 창고에 강제로 묻어두려 했다. 그러나 독재권력도 무너지고 그들이 왜곡했던 역사의 진실도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한 때 판매금지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도 해방전후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 시대를 올바르게 정리해야 그 이후의 역사도 정직하게 씌여진다.정직한역사를 통해 역사의 시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1999-02-0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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