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관광객을 태운 금강산행 첫 배가 18일 마침내 떠났다. ‘마침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동안 일이 잘 되느니 안 되느니 곡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북이 고향이 아니어서 그런지,당장 가 보고 싶은 열망까지는 없다. 우선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또,이런저런 제약이 많아 퍽 신경 써야 하는 여행이 될것 같은 것도 내키지 않는 이유다. 시일이 한참 지나면 요금도 내리고 제약도 좀 풀릴 것이니 언젠가는 그 곳 절경을 가 보게 될 것이다.
그래도,금강산 관광길이 하루라도 일찍 열리기를 바란 것은,남북간의 굳은 장벽이 작은 틈새나마 열리고 앞으로 이 틈새가 점점 넓어지면서 양쪽의 신뢰와 이해가 쌓일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에서였다. 다른 많은 분의 생각도 이와 같을 것이다.
○남북 ‘신뢰감 구축’ 희망 싹터
금강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초등학교 때 배운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하는 노래 구절이다. 어린 시절 배운 이 노래는 강산을 뇌리에 깊이 새겨 놓았다.
장성해서 들은 ‘그리운 금강산’이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그 각인을 더욱 깊게 했다. 여기까지는 국민적인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금강산하면 안춘근이란 분을 생각하게 된다. 몇 년 전에 작고 한 이 분의 고향이 금강산 기슭에 있는 반농반어의 작은 마을이었다.
고서수집가,출판평론가,수필가로 활동한 그는 ‘고향’ ‘언제 고향에 갈수 있을까’ ‘우리들의 자랑 금강산’등 여러 편의 글에 고향 마을과 금강산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그는 아호를 출생지인 외금강면 남애리를 따서 남애라고 하면서 고향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다가 금강산 뱃길이 열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이승을 떠났다.
아마 생존했더라면 이번 첫 배에 꼭 탔을 것이다.
금강산 옛 그림 스무 폭으로 꾸민 병풍과 금강산 흙으로 빚은 불상을 서재에 두고 따뜻한 고향 흙냄새를 맡으려고 했던 그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는 ‘대한팔경’의 “에헤 금강산 일만이천,봉마다 기암이요”하는 구절이 시작되면 어떤 일을 하다가도 일손을 멈추고 듣고,몇 명 모이지 않는 장전 남국민학교 동창회 때는 이노래를 합창한다고 했었다.
고령인데도 이 추운 날씨에 비싼 노자를 들여 금강호에 오른 관광객 가운데는 남애와 같은 심정인 분들이 있을 것이다.
○육로도 하루빨리 열렸으면
남북이 분단된 지 반세기. 북에 고향을 두고 온 이들은 고령이 되었다. 많은 이가 이미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세상을 떴다.
금강산 가는 길이 뱃길만 아니라 육로로도 열리고,금강산뿐만 아니라 북의 다른 지역도 통행할 수 있게 되어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하고 염원하는 이들이 고향에 가 볼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일반 관광객에 앞서 금강산을 다녀온 사람들이 전하는 것을 보면,우회도로와 철조망으로 북한 주민들과 접촉할 수 없게 해 놓았더라고 하니,이 기원의 실현은 어려울 것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누가 알랴. 남한 관광객을 태운 커다란 배가 동해항에서 장전항까지 가게 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듯이,생각보다 빨리 북한의 다른 지역 통행도 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올지.<편집국 부국장 pensanto@daehanmaeil.com>
북이 고향이 아니어서 그런지,당장 가 보고 싶은 열망까지는 없다. 우선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또,이런저런 제약이 많아 퍽 신경 써야 하는 여행이 될것 같은 것도 내키지 않는 이유다. 시일이 한참 지나면 요금도 내리고 제약도 좀 풀릴 것이니 언젠가는 그 곳 절경을 가 보게 될 것이다.
그래도,금강산 관광길이 하루라도 일찍 열리기를 바란 것은,남북간의 굳은 장벽이 작은 틈새나마 열리고 앞으로 이 틈새가 점점 넓어지면서 양쪽의 신뢰와 이해가 쌓일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에서였다. 다른 많은 분의 생각도 이와 같을 것이다.
○남북 ‘신뢰감 구축’ 희망 싹터
금강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초등학교 때 배운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하는 노래 구절이다. 어린 시절 배운 이 노래는 강산을 뇌리에 깊이 새겨 놓았다.
장성해서 들은 ‘그리운 금강산’이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그 각인을 더욱 깊게 했다. 여기까지는 국민적인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금강산하면 안춘근이란 분을 생각하게 된다. 몇 년 전에 작고 한 이 분의 고향이 금강산 기슭에 있는 반농반어의 작은 마을이었다.
고서수집가,출판평론가,수필가로 활동한 그는 ‘고향’ ‘언제 고향에 갈수 있을까’ ‘우리들의 자랑 금강산’등 여러 편의 글에 고향 마을과 금강산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그는 아호를 출생지인 외금강면 남애리를 따서 남애라고 하면서 고향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다가 금강산 뱃길이 열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이승을 떠났다.
아마 생존했더라면 이번 첫 배에 꼭 탔을 것이다.
금강산 옛 그림 스무 폭으로 꾸민 병풍과 금강산 흙으로 빚은 불상을 서재에 두고 따뜻한 고향 흙냄새를 맡으려고 했던 그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는 ‘대한팔경’의 “에헤 금강산 일만이천,봉마다 기암이요”하는 구절이 시작되면 어떤 일을 하다가도 일손을 멈추고 듣고,몇 명 모이지 않는 장전 남국민학교 동창회 때는 이노래를 합창한다고 했었다.
고령인데도 이 추운 날씨에 비싼 노자를 들여 금강호에 오른 관광객 가운데는 남애와 같은 심정인 분들이 있을 것이다.
○육로도 하루빨리 열렸으면
남북이 분단된 지 반세기. 북에 고향을 두고 온 이들은 고령이 되었다. 많은 이가 이미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세상을 떴다.
금강산 가는 길이 뱃길만 아니라 육로로도 열리고,금강산뿐만 아니라 북의 다른 지역도 통행할 수 있게 되어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하고 염원하는 이들이 고향에 가 볼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일반 관광객에 앞서 금강산을 다녀온 사람들이 전하는 것을 보면,우회도로와 철조망으로 북한 주민들과 접촉할 수 없게 해 놓았더라고 하니,이 기원의 실현은 어려울 것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누가 알랴. 남한 관광객을 태운 커다란 배가 동해항에서 장전항까지 가게 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듯이,생각보다 빨리 북한의 다른 지역 통행도 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올지.<편집국 부국장 pensanto@daehanmaeil.com>
1998-11-20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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