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日의 군상:4/李瑄根 前 문교장관(정직한 역사 되찾기)

親日의 군상:4/李瑄根 前 문교장관(정직한 역사 되찾기)

정운현 기자 기자
입력 1998-08-31 00:00
수정 1998-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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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친일파 거두로… 유신 옹호자로/역사는 그를 왜 친일파로 기록하는가/관동군 군량미 ‘보급창고’ 만몽산업의 상무/독립군 토벌 후원단체 ‘동남지구…’ 상무위원/일제 괴뢰정부 만주국 ‘국회의원’ 지내기도/해방후 행적­敎聯회장·3개대학 총장·국민헌장 제정 참여·정신문화연구원 원장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가장 건실한 신(新)질서를 건설해야만 될 것은 유구한 인류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중대 사명으로…좀더 솔직하고 좀더 용감하게 신체제 건설에 희생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특히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활동은…민족협화(民族協和)의 신흥제국(新興帝國·만주제국을 지칭함)에 있어서 가장 솔직한 자기반성으로 이 운동의 광휘있는 실천은 장래 선계(鮮系·조선인)국민에게 정치적으로,사회적으로,정신적으로 반드시 좋은 영향을 가져오리라고 봅니다.…”(‘삼천리’1940.12월호)

누가 쓴 글일까? 만주국(滿洲國) 건설에 조선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하고 있는 이 글을 쓴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다.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이다.

하성(霞城) 李瑄根(1905∼1983). 문교장관과 수차례 대학총장을 지낸 이선근이 바로 이 글의 필자다. ‘과연 그가 이 글을 썼을까’하는 의문이 갈 정도다. 왜냐하면 이선근의 해방후 경력은 ‘민족적인’ 냄새로 분칠이 돼 있기 때문이다. ‘화랑도(花郞道) 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독립운동사’를 저술하기도 했던 그다. 얼핏 보면 그는 ‘친일(親日)’과는 거리가 먼 사람같이 보인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는 해방후 일찌감치부터 소문난 친일파였음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사 저술로 ‘과거’ 위장

일제당시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현 ‘서울신문’의 전신)는 해방후 미군정에 접수된 후 10월 25일 조선인 주주총회를 열고 사장 吳世昌,부사장 李相協,전무 金炯元 등 새 경영진을 구성·발표하였다. 이선근은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이 명단 속에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이 인사는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유는 새로 임명된 주요간부 대다수가 친일경력자라는 것. 이선근도 이 명단 속에들어 있었다. 과연 이선근은 친일파인가? 구체적으로 언제,어디서,어떤 행적을 했길래 역사는 그를 친일파로 기록하는가. 반세기 이전의 만주(滿洲)땅으로 그를 찾아가 보자.

이선근은 경기도 개풍(開豊·현 개성)사람으로 본관은 전주(全州)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데다 일찍 신학문에 눈떠 휘문고보 졸업(1922년)후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1929년 와세다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귀국하여 첫 직장으로 ‘조선일보(朝鮮日報)’에 입사하였다. 당시 나이 24세. 그는 입사 1년 반만에 최연소 정치부장을 거쳐 이듬해 약관 25세로 국장이 공석인 국장대리로 승진하여 사실상 편집국장이 되었다. 그 시절을 두고 그는 “입사 한 달만에 사설(社說)을 쓰기도 했다”고 자랑한 바 있다. 그의 신문사 생활은 3년만에 막을 내렸다.

한편 1937년 ‘만주행(滿洲行)’으로 그는 인생에서 한 전환기를 맞는다. 이 무렵 ‘동양(東洋)의 서부’로 불리던 만주는 출세욕에 불타는 군인·지식인,일확천금을 노린 모략자·협잡꾼들이 앞다퉈 모여들던 신(新)개척지였다. 특히 일본인과의 차별대우로 야망을 좌절당한 조선청년들에게 ‘무법지대’ 만주는 오히려 ‘희망의 땅’이었다.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朴正熙 전 대통령은 ‘긴 칼 차고 싶어’ 만주로 가서는 군인이 되었고 조선인 일본유학생 상당수는 만주로 가서 고급관리가 되었다. ‘야망가’ 이선근의 ‘만주행’은 당시 시대상황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로서는 놀라운 변신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가 만주에서 보낸 8년은 결국 그에게 ‘친일파’란 오명을 남겨주었다.

1940년 9월21일자 ‘만선일보(滿鮮日報)’를 보면 이 해 만주국 협화회(協和會) 전국연합회(약칭 全聯) 조선계 대표 16명중 한 사람으로 이선근이 소개돼 있다. 이선근의 당시 직책은 빈강성(濱江省) 오상현(五常縣) 안가촌(安家村)분회 부(副)분회장.

조선일보 퇴직후 잠시 고향에서 교편을 잡던 이선근은 이 지역출신 孔鎭恒씨와 의기투합,1937년 만주행에 올랐다. 孔씨는 개성 백만장자의 아들로 일본와세다대학 영문과를 나와 파리와 런던에서 유학한 지식인.그는 유럽 유학후 귀국길에 시베리아,만주를 경유하였는데,이 때 만주에 대규모 농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가 후에 만몽(滿蒙)산업주식회사를 설립,사장에 취임했다. 이 회사가 조선인 유랑민을 동원,개척한 안가(安家)농장은 총면적 7천만평,수용가구(家口)만도 4천가구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지난 94년 이선근의 친일행적 조사차 안가농장 현지를 답사한 具良根 교수(성신여대·중문과)는 당시 안가농장의 성격을 두고 “관동군(關東軍)의 군량미 보급기지나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하고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우창따미(五常大米)’는 지금도 중국 최고의 쌀로 소문나 있다”고 밝혔다.

이선근의 친일활동은 그가 만몽산업의 상무이사로 있으면서 관동군의 군량미 충당에 협조한 점이 그 첫째다. 전통적으로 쌀을 주식으로 해온 일본군에게 있어서 쌀농사는 총포(銃砲) 이상 가는 전쟁물자 지원이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선근은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친일파들과 어울려 친일대열에 가세한다. 대표적인 친일행적의 하나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활동을 들 수 있다. 1940년 10월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에서 발족된 이 단체는 선비(鮮匪·조선인 항일세력),토비(土匪·만주토착 항일세력) 등 이 지역 항일세력들을 토벌하던 관동군을 측면에서 지원한 조선인 주축의 대표적 친일조직. 당시 만주 건국대 교수로 있던 육당 崔南善은 이단체에서 고문을,이선근은 협화회 봉천성 대표 徐範錫(해방후 6선의원 지냄)등과 함께 상무위원을 지냈다. 나중에 그가 만주국의 국회격인 협화회 협의원에 발탁된 것도 이런 공로(?) 때문이었다.

한편 해방후 이선근은 李承晩정권 하에서 문교장관,성균관대 총장 등을 거쳐 朴正熙정권과 다시 줄을 대는데 여기에는 ‘만주경력’이 알게 모르게 작용한 면이 없지 않다. 朴정권은 만주군관학교와 만주국 관리양성소인 대동학원(大同學院) 출신자 등 만주인맥에 권력기반의 한 줄기를 두고 있었다. 朴정권 말기 총리를 지낸 崔圭夏 전 대통령도 대동학원 출신으로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냈다.

○교육·문화계 요직 독식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이선근은 朴정권 하에서 승승장구하였다. 문화재위원장(69년),영남대 총장(69년),동국대 총장(74년),대한교련(敎聯)회장(76년),초대 정신문화연구원장(76년)등 교육·문화계의 요직을 거의 독식하였다. 그가 이같은 초특급 대우를 받은 배경에는 그가 유신(維新)체제 홍보의 나팔수를 자임한 공로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동국대 총장 취임사 한 구절을 보자. “…민족,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는 유신(維新)정신,새마을정신으로 우리 동대(東大·동국대)의 발전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東大新聞’,1974.7.30) 그는 대학총장 시절에도 내놓고 유신체제를 선전한 인물이다. 정식으로 ‘유신옹호’ 논문도 쓰고 강연도 여러 차례 했었다.

박정권 말기인 78년에 문을 연 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은 사실상 그의 주도로 설립됐다. 초창기에는 대만의 ‘중앙연구원’을 모델로 하여 순수 학술연구기관을 만든다고 선전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체제옹호용 기관이 되었다.

권력자를 향한 그의 ‘아부기질’은 李承晩­朴正熙에 이어 全斗煥시대까지 계속됐다. 광주(光州)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시점인 80년 8월. 그는 한인터뷰에서 “全斗煥 장군은 위기상황 극복의 최적임자”라고 추켜세우고는 “全斗煥 장군을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된다는데 국민의 여망이 모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지적했다(‘서울신문’,1980.8.20).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뭐라고 변명을 할까.

해방후 대다수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역대 정권때마다 전천후형(全天候型) 인간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역사학계의 한 중진교수는 “자신의 과거경력을 위장하기 위해 그는 독립운동사와 같은 책을 의도적으로 썼다” 며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권력자의 전위대였다”고 혹평했다.

83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과거행적에 대해 단 한번도 뉘우치거나 사죄한 적이 없다. 오히려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묻혔다.

◎協和會란?

‘협화회(協和會)’란 일제가 만주사변 이듬해(1932년)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을 통치하기 위해 만든 ‘국가기구로서의 단체’.일본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조선의 국민총력조선연맹와 같은 관변·어용기관을 본따 전(全)만주의 전(全)인종을 망라하여 조직한 이 단체는 민족간의 ‘협동과 화합’,항일세력에 대한 선무(煽撫)공작 등이 주요 설립목적이다..

기구는 정부조직의 국무원­성(省)­현(縣)에 대응하여 전국연합협의회­성(省)연합협의회 등의 협의기구와 지방의 집행기관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회장직은 만주국 국무총리가 맡았다.

신동원 서울시의원, 애니멀호더 고립가구 후원 연계

신동원 서울시의원(보건복지위원회 부위원장, 노원1)이 노원구 상계동 애니멀호더 고립가구에 연탄과 담요 등 생필품 후원을 연계했다. 사랑의전화복지재단(이사장 심정은)은 지난 19일과 24일 애니멀호더 가정에 직접 연탄 1000장과 생수, 휴지, 새 이불 등을 후원했다. 심정은 사랑의전화복지재단 이사장은 “어려운 분들께 난방이나 생필품을 지원해 드리는 건 저희가 해야 할 역할이다. 그렇게 거의 고립되어있는 분들을 돕는 것도 저희 재단의 역할이다. 큰 도움은 아니지만 저희 마음이 잘 전해지길 바라고 앞으로 실질적인 변화가 생길 수 있도록 지속적인 지원을 하겠다 ”라고 말했다. 사랑의전화복지재단은 고 심철호 개그맨이 1970년대 ‘새마을봉사단’ 대장을 하면서 지역사회 복지에 관심을 갖게 돼 1981년 사재 1억 5000만원을 털어 개설한 24시간 전화상담센터로 출발했다. 이후 사업을 확장해 무료노인 전문병원, 노숙자 무료숙박 시설을 운영하면서 취약계층 아동, 청소년, 독거노인 지원 등 국내 사회공헌활동과 공익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재단은 해외에 케냐와 르완다 등에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점심 급식을 지원하며 기아문제도 해결하고 있다. 지난 12월 16일에
thumbnail - 신동원 서울시의원, 애니멀호더 고립가구 후원 연계

전체 회원수는 1940년 현재 5족(五族,일본인·만주족·조선족·몽고인·중국인)을 통틀어 1백 67만여 명. 회원 가운데 민족별로 대표자(협의원)를 뽑아 매년 전국대회를 가졌는데 1938년도 전국연합협의회(약칭 全聯)에서는 총참가대표 1백72명중 조선계 대표는 12인이었다.<鄭雲鉉 기자 jwh59@seoul.co.kr>
1998-08-31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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