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탄생·열망’ 창조하는 예술가/국립묘지 현충탑·독립기념관 ‘추념의 장’ 대표작/작품마다 한국적 개성 독특… 미유럽서도 호평
‘문화란 특수층의 향유물이 아니며 모든 사람들이 고루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조각가 최기원의 신조다.그는‘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태어났는가,어떻게 머무르고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를 풀기 위한 방법으로 조각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의 예감대로 군중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공공장소에 대형조각품들을 설치할 수 있었다. 동작동 국립묘지의 현충탑,독립기념관의‘추념의 장’을 비롯한‘태초의 빛’‘비천상’등 기념물과 각종 상징탑,발전상과 성장탑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불꽃같은 정열과 확신에 찬 신념으로 그는‘비상’과 ‘탄생’과 ‘열망’을 일사불란하게 창조하는 시기다.
○국전 4회 연속 특선
그가 미술의 등용문인 국전을 통해 데뷔하던 56년에는 ‘추상조각’분야가 따로 없었으나 연속4회 특선으로 추천작가가 되자 자기 내면에 꿈틀거리던 상상속의 형상,상징적 주제들을자유롭고 분방하게 모색할 수 있었다.예를들어 불꽃과 꽃봉오리,나무와 새와 열매의 구상적 형상을 서로 통합시키거나 형태적 변주로 탄생을 계시하는가하면 앵포르멜적 성향에서는 ‘예리한 선조의 구조’로 섬세한 용접에 의한 평면투조를 추구하여 청동의 부식효과로 세월의 영욕을 표현해 내기도 했다. 평론가 이일씨에 따르면 63년,한국작가들이 파리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했을 때 오프닝에 참석했던 당시 프랑스 드골내각의 공보담당 국무상이었던 앙드레 말로가‘최기원의 동양적 사유가 깃든 작품에 관심’을 보인 것이 그가 화단의 주목을 받게된 계기다.이후 그의 작품성은 지난 92년에도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험프리 화인아트 초대전에서 화랑대표인 리처드 험프리씨가‘한국적 개성이 돋보이는 그의 청동조각품은 세계적인 미술시장 불황에도 불구하고 콜렉터들이 다투어 소장하기를 원한다’는 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작품 창작땐 ‘완벽’ 주의
결국 그가 끈질기게 파고든 ‘탄생’시리즈는 발전과 흥성을 상징하는 가운데 생명의 근원인 물과 불을 다루게 되었고 기하학적 패턴에 의한 추상적인 개념속에 다양한 형태를 변주시켜 인류의 개화나 창조적 미래를 암시하기도 한다.이른바 ‘우의적’형상에 따뜻한 휴머니즘이 감도는‘화합’의 ‘조율’을 성취해낸 것이다. 역시 미술평론가인 김복영은 ‘동양적 사유에 바탕을 둔 예술을 발현하기 위해 그가 얼마만큼 집념을 불태우고 있는 작가인가’를 설명하는 글에서‘그의 작품은 생명의 탄생을 해석하는 동양인의 마음을 한눈에 보여준다’고 말한다.그 한 예로 외환은행본점 정문 보도에 세워진 ‘영원한 불꽃’은 거대한 고층빌딩과 조화를 이룬 둥근 형태와 간결한 곡선,화살처럼 날카롭게 하늘로 치솟는 사선에 불꽃과 분수로 물과 불의 개념을 자연스럽게 유도해낸다. 독립기념관의 ‘추념의 장’도 후면에 설치된 대형부조는 나지막한 능선의 양날개에 성화대를 배치하고 건물 전면에는 태극을 의미하는 둥근 원속에서 힘차게 치솟는 분수로 물과 불의 작출을 시도하고 있다. 그때마다 그의 소재는 언제나 청동이었고 지나친 청동집착에 대해 오광수는 ‘황금빛을 연상케하는 찬란한 동빛과 이끼가 낀 푸른 구성으로 자신의 조형을 드라마틱한 상황으로 몰아가면서 예각적인 선조와 구형의 공존,직선과 곡선의 대비로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고 평한다.
최기원은 순서울토박이다.종로구 연지동에서 은행원인 최용구씨의 아들 3형제중 막내.효제초등학교 후배이자 서양화가인 이만익에 의하면 ‘동이 지니고 있는 재료적 특성으로 한국의 미를 발굴하는 작가’로서 개성을 남발하지 않지만 작품에 임할 때는 철두철미하게 ‘완벽’을 기하는 주의다.서울의 문안사람답게 자화자찬을 싫어하고 남에게 폐끼치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정겨운 대인관계를 유지한다.문학과 술과 친구를 좋아하고 한때는 충신동에 있던 월탄댁이나 미당,김동리씨가 나오던 명동 청동다방에 드나들기도 했다.집안은 예술적인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가 하고싶은 것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
그의 수많은 작품중에서도 ‘그림자 놀이’시리즈는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새의 눈을 만들고 새는 언제나 설화적인 알(난)을 품고 미래를 향해 똑바른 응시를 찬연하게 지속시킨다.그것은 승리와 탄생과 창조를 예고하지만 과불급이 없는 중용을 깨뜨리지 않는 것도 그만의 장점이다.이와 관련하여 그의 종교관을 엿볼수 있는 작품으로는 천안시 태조산 각원사에 세운 세계최대의 야외 청동좌불과 속리산 법주사 야외 청동미륵대불을 빼놓을 수 없다. 각원사 좌불청동상은 3년의 긴 역사끝에 얻어진 결과로 앉은 키만도 14m20㎝,일본 가마쿠라(겸창)의 불상보다 1m가 더 높은 대작이다.그는 이 작업을 맡기까지 불교관계자들과 ‘100번도 더 넘게’만나야 했고 ‘욕심이 없는 순수한 심성’을 타진하는 과정에서 까다로운 절차가 번거로운 나머지 중도에서 그만두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불상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킬 수있었다.가족은 전배구선수이던 부인 김성희씨와의 사이에 1남3녀,평소엔 짙은 남색셔츠에 정장을 즐기는 멋장이지만 흙공장을 연상케하는 목동 작업장에 들어서면 노동자로 변신해버린다. 그는 절차탁마끝에 예술가로서 가장 정상에 서서 주변의 존경과 흠모를 받는 위치다.그러나 ‘깨끗한 청년성’과 ‘불꽃’의 열정을 잃지않는 그는 자코메티가 말한대로 ‘하나를 만들면 천개가 연달아 나오는 샘물같은 영감’과 ‘형태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에서 과일이 열리듯이 열려져 나온다’는 것을 터득한지 오래다.그래선지 ‘예술은 미의 방법을 통해 진과 선의 문제를 포용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자신의 ‘불꽃’을 내면에 감춘채 다만 물처럼 부드럽게 흐르면서 제2,제3의 ‘탄생’과 ‘창조’를 지금도 끊임없이 모색하는 자세다.<사빈 논설위원>
□연보
▲1957년 홍익대 조각과 졸업
▲195659년 국전 연속 4회 특선(문교부장관상 수상)
▲1960년부터 국전추천·초대작가
▲1963년 파리비엔날레출품(프랑스 현대미술관 작품소장)
▲196769년 한국미술협회이사
▲1969년 한국현대조각회창립 회장
▲1972년 개인전(신문회관 화랑)
▲1982년부터 현대미술초대전 초대작가 및 운영위원
▲1984년부터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조각분과위원장,동아미술제심사위원
▲198486년 독립기념관 ‘추념의 장’지명공모 당선,작품제작
▲1985년 선화랑 초대개인전,서울신문사주최 서울현대조각공모전 심사위원,한국조각가협회 창립회장
▲1988년 88올림픽예술축제한국현대미술초대전,도시의 환경조각전
<현재>홍익대 교수,한국조각가협회회장,한국미술협회고문
<수상>아시아반공연맹최고상(57년)문교부문예상(66년)국전초대작가상·예술원장상(81년)
‘문화란 특수층의 향유물이 아니며 모든 사람들이 고루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조각가 최기원의 신조다.그는‘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태어났는가,어떻게 머무르고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를 풀기 위한 방법으로 조각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의 예감대로 군중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공공장소에 대형조각품들을 설치할 수 있었다. 동작동 국립묘지의 현충탑,독립기념관의‘추념의 장’을 비롯한‘태초의 빛’‘비천상’등 기념물과 각종 상징탑,발전상과 성장탑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불꽃같은 정열과 확신에 찬 신념으로 그는‘비상’과 ‘탄생’과 ‘열망’을 일사불란하게 창조하는 시기다.
○국전 4회 연속 특선
그가 미술의 등용문인 국전을 통해 데뷔하던 56년에는 ‘추상조각’분야가 따로 없었으나 연속4회 특선으로 추천작가가 되자 자기 내면에 꿈틀거리던 상상속의 형상,상징적 주제들을자유롭고 분방하게 모색할 수 있었다.예를들어 불꽃과 꽃봉오리,나무와 새와 열매의 구상적 형상을 서로 통합시키거나 형태적 변주로 탄생을 계시하는가하면 앵포르멜적 성향에서는 ‘예리한 선조의 구조’로 섬세한 용접에 의한 평면투조를 추구하여 청동의 부식효과로 세월의 영욕을 표현해 내기도 했다. 평론가 이일씨에 따르면 63년,한국작가들이 파리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했을 때 오프닝에 참석했던 당시 프랑스 드골내각의 공보담당 국무상이었던 앙드레 말로가‘최기원의 동양적 사유가 깃든 작품에 관심’을 보인 것이 그가 화단의 주목을 받게된 계기다.이후 그의 작품성은 지난 92년에도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험프리 화인아트 초대전에서 화랑대표인 리처드 험프리씨가‘한국적 개성이 돋보이는 그의 청동조각품은 세계적인 미술시장 불황에도 불구하고 콜렉터들이 다투어 소장하기를 원한다’는 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작품 창작땐 ‘완벽’ 주의
결국 그가 끈질기게 파고든 ‘탄생’시리즈는 발전과 흥성을 상징하는 가운데 생명의 근원인 물과 불을 다루게 되었고 기하학적 패턴에 의한 추상적인 개념속에 다양한 형태를 변주시켜 인류의 개화나 창조적 미래를 암시하기도 한다.이른바 ‘우의적’형상에 따뜻한 휴머니즘이 감도는‘화합’의 ‘조율’을 성취해낸 것이다. 역시 미술평론가인 김복영은 ‘동양적 사유에 바탕을 둔 예술을 발현하기 위해 그가 얼마만큼 집념을 불태우고 있는 작가인가’를 설명하는 글에서‘그의 작품은 생명의 탄생을 해석하는 동양인의 마음을 한눈에 보여준다’고 말한다.그 한 예로 외환은행본점 정문 보도에 세워진 ‘영원한 불꽃’은 거대한 고층빌딩과 조화를 이룬 둥근 형태와 간결한 곡선,화살처럼 날카롭게 하늘로 치솟는 사선에 불꽃과 분수로 물과 불의 개념을 자연스럽게 유도해낸다. 독립기념관의 ‘추념의 장’도 후면에 설치된 대형부조는 나지막한 능선의 양날개에 성화대를 배치하고 건물 전면에는 태극을 의미하는 둥근 원속에서 힘차게 치솟는 분수로 물과 불의 작출을 시도하고 있다. 그때마다 그의 소재는 언제나 청동이었고 지나친 청동집착에 대해 오광수는 ‘황금빛을 연상케하는 찬란한 동빛과 이끼가 낀 푸른 구성으로 자신의 조형을 드라마틱한 상황으로 몰아가면서 예각적인 선조와 구형의 공존,직선과 곡선의 대비로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고 평한다.
최기원은 순서울토박이다.종로구 연지동에서 은행원인 최용구씨의 아들 3형제중 막내.효제초등학교 후배이자 서양화가인 이만익에 의하면 ‘동이 지니고 있는 재료적 특성으로 한국의 미를 발굴하는 작가’로서 개성을 남발하지 않지만 작품에 임할 때는 철두철미하게 ‘완벽’을 기하는 주의다.서울의 문안사람답게 자화자찬을 싫어하고 남에게 폐끼치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정겨운 대인관계를 유지한다.문학과 술과 친구를 좋아하고 한때는 충신동에 있던 월탄댁이나 미당,김동리씨가 나오던 명동 청동다방에 드나들기도 했다.집안은 예술적인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가 하고싶은 것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
그의 수많은 작품중에서도 ‘그림자 놀이’시리즈는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새의 눈을 만들고 새는 언제나 설화적인 알(난)을 품고 미래를 향해 똑바른 응시를 찬연하게 지속시킨다.그것은 승리와 탄생과 창조를 예고하지만 과불급이 없는 중용을 깨뜨리지 않는 것도 그만의 장점이다.이와 관련하여 그의 종교관을 엿볼수 있는 작품으로는 천안시 태조산 각원사에 세운 세계최대의 야외 청동좌불과 속리산 법주사 야외 청동미륵대불을 빼놓을 수 없다. 각원사 좌불청동상은 3년의 긴 역사끝에 얻어진 결과로 앉은 키만도 14m20㎝,일본 가마쿠라(겸창)의 불상보다 1m가 더 높은 대작이다.그는 이 작업을 맡기까지 불교관계자들과 ‘100번도 더 넘게’만나야 했고 ‘욕심이 없는 순수한 심성’을 타진하는 과정에서 까다로운 절차가 번거로운 나머지 중도에서 그만두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불상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킬 수있었다.가족은 전배구선수이던 부인 김성희씨와의 사이에 1남3녀,평소엔 짙은 남색셔츠에 정장을 즐기는 멋장이지만 흙공장을 연상케하는 목동 작업장에 들어서면 노동자로 변신해버린다. 그는 절차탁마끝에 예술가로서 가장 정상에 서서 주변의 존경과 흠모를 받는 위치다.그러나 ‘깨끗한 청년성’과 ‘불꽃’의 열정을 잃지않는 그는 자코메티가 말한대로 ‘하나를 만들면 천개가 연달아 나오는 샘물같은 영감’과 ‘형태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에서 과일이 열리듯이 열려져 나온다’는 것을 터득한지 오래다.그래선지 ‘예술은 미의 방법을 통해 진과 선의 문제를 포용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자신의 ‘불꽃’을 내면에 감춘채 다만 물처럼 부드럽게 흐르면서 제2,제3의 ‘탄생’과 ‘창조’를 지금도 끊임없이 모색하는 자세다.<사빈 논설위원>
□연보
▲1957년 홍익대 조각과 졸업
▲195659년 국전 연속 4회 특선(문교부장관상 수상)
▲1960년부터 국전추천·초대작가
▲1963년 파리비엔날레출품(프랑스 현대미술관 작품소장)
▲196769년 한국미술협회이사
▲1969년 한국현대조각회창립 회장
▲1972년 개인전(신문회관 화랑)
▲1982년부터 현대미술초대전 초대작가 및 운영위원
▲1984년부터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조각분과위원장,동아미술제심사위원
▲198486년 독립기념관 ‘추념의 장’지명공모 당선,작품제작
▲1985년 선화랑 초대개인전,서울신문사주최 서울현대조각공모전 심사위원,한국조각가협회 창립회장
▲1988년 88올림픽예술축제한국현대미술초대전,도시의 환경조각전
<현재>홍익대 교수,한국조각가협회회장,한국미술협회고문
<수상>아시아반공연맹최고상(57년)문교부문예상(66년)국전초대작가상·예술원장상(81년)
1998-03-13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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