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속 촌지장부/하성란 소설가(굄돌)

장롱속 촌지장부/하성란 소설가(굄돌)

하성란 기자 기자
입력 1997-07-17 00:00
수정 1997-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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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감기약을 먹고 잔 날이었다.꿈속에서 나는 중학생으로 되돌아가 있었다.교실문이 열리고 물상을 가르치는 담임 선생이 들어섰다.칠판 가득 원소량을 계산하는 문제를 쓰고 선생은 앞줄에 앉은 아이들부터 일으켜세웠다.뒷자리로 다가오면서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답을 알 턱이 없었다.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은 물상 그리고 수학이었으니까 말이다.키가 큰 것이 답도 모르냐? 선생 특유의 질책이 이어졌다.150㎝ 키의 선생은 늘 자신의 키보다도 긴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몽둥이가 너무 긴 탓에 복도 쪽에 앉은 아이들의 손바닥을 때릴 때에도 창가와 가까운 1분단으로 가야 했다.꿈속에서도 그 장면은 우스꽝스러웠다.손바닥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눈을 뜨고 나서도 기분은 우울했다.벌써 15년이 넘은 일인데 왜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일까.

오래 전 미장원에서 낡은 잡지를 뒤적이다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일본의 모델에 관한 신상명세서였는데 그녀의 전직은 바로 학교 선생이었다.그녀가 학교를 그만두게 된 이유는 간단하게도 편애였다.자신의 성격 때문에 고민하다가 안정된 작장을 포기한 그녀의 이력이 한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한 교사의 장롱속에서 촌지 장부가 발견되었다.값비싼 선물을 받은 아이에게 어쩔수 없이 눈길이 한번 더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그 장부는 이를테면 편애 장부이다.장부의 숫자에 따라 사랑을 주는 양도 가감이 되었을테니 말이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눈앞에 발현한 신과도 같다.세월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어린 아이들은 선생님이 화장실에 간다는 사실에 놀란다.더 이상의 추한 모습으로 스승의 신성에 먹칠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자신에게 교사의 자질이 없다면 미련없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것이 마지막 용기다.

꿈이여,다시 괴롭히지 말길.난 이제 학생이 아니다.

1997-07-17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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