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자 관련사항◁
○김정일의 건강·성격
최근 김정일의 건강은 양호한 편이며 금년 1·1 ‘금수산 기념궁전’참배시 만났을 때에도 건강에 이상징후는 보이지 않았음.
김정일은 일을 하거나 파티를 하기 위해 밤을 새는 일이 잦으며 새벽 3∼4시에 건설현장이나 행사준비장에 갑자기 나타나거나 간부들에게 전화를 하는등 거의 잠을 자지않고 일한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음.
김일성은 김정일이 포용력이 크다고 자랑하였으나 사실은 소심하며 좋고 싫은 것에 대한 감정의 변화가 지나칠 정도여서 아부하는 부하를 편애하다가도 조금이라도 의심의 소지가 생기면 내팽개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
○김정일의 호화사치 행태
본질적인 면에서는 ‘김부자’가 다 개인독재로 다를 바가 없으나 김일성은 스케일이 크고 폭이 넓어 인민들을 기만해도 무난했는데 김정일은 무계획적이며 조급함.
김일성은 정책결정시 간부들의 의견을 묻기도 했으나 김정일은 독단으로 결정하며 자기의 정책이나 노선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면 가차없이 처벌함.
김정일은 사소한 일까지도 일일이 간섭을 하여 당비서 주택을 몇층 몇호로 배정하라거나 선물을 보내는 것까지 직접함.
○김일성 권력장악 과정
김일성은 6·25전후 국내파(남로당)→연안파→소련파→빨치산내 반대세력(갑산파·군사파)의 순으로 단계적 숙청을 진행하였으며 전쟁직후 이승엽·박헌영 등 남로당 계열을 ‘간첩죄’로 몰아 전쟁책임을 덮어 씌우면서 제거하였음.
50년대 후반 김일성이 동구권을 장기 외유중(56·6∼7)최창익·윤공흠 등이 반김일성 음모를 꾸민 소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연안파·소련파를 제거하였음.
60년대 후반의 갑산파·군사파 제거에는 삼촌 김영주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김정일이 관여하기 시작하였음.
69∼70년중 허봉학·김광협 등 군사인물 숙청과정에는 김정일과 친하게 된 오진우가 주도하였고 김영주의 세력 약화가 목적이었으며 60년대말부터 김정일이 당사업에 영향력을 행사했음.
김일성은 60년대 후반의 2차례에 걸친 빨치산직계 패거리들에 대한 숙청으로 절대적 충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간부들은 김정일의눈치를 보기 시작하였음.
60년대 반대파 숙청이후 김일성 1인독재가 심화되었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여지는 말살되었음.60년대까지는 당내 토의과정에서 형식상이나마 ‘거수가결’도 행해졌으나 김정일이 70년대초 유일사상체계를 강조한 이후는 절대지지 일색이었음.
‘수령의 말씀은 곧 ‘법’으로 100% 내리먹일뿐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의한 간부들의 창발성은 허용의 여지가 없어졌음. 이때부터 김정일이 오진우를 비롯간 일부 군 간부와 함께 군대를 2배로 늘리는등 중국의 도움없이 전쟁에서 이길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아래 군국주의를 강화하였음.
○김정일의 권력장악 과정
김정일은 아동시절에는 ‘수상놀이’를 하고 학생시절에는 ‘김일성 업무에 조력’하는 등 권력 지향적 행태를 표출하였음.
어린시절 놀이하는 모습을 보면 김정일이 자신은 수상 노릇을 하고 다른 아이들은 상(장관)을 시켜놓고 호령을 하곤 했으며 청소년 시절에는 김일성의 관심사안을 연구하는 등 김일성에게 잘보이려고 무척 노력했음.
59·1 황장엽은 김부자를 수행하여 소련 공산당 21차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그때 김정일(17세)이 김일성의 일정을 주도해서 짤 정도로 맹랑한 모습을 보였음.
김정일은 중앙당 근무시작(64·6)이래 인사문제 및 숙청에 관여하고 김일성 우상화를 주도하는 등 정치력을 발휘하였음.
64·6 중앙당에 지도원으로 처음 들어와서는 놀기를 좋아해서인지 선전·예술분야의 일을 맡아 보더니 점차 사람을 끌어모으고 조직부의 인사문제에도 관여하였으며 60년대 후반 김일성이 같은 빨치산파이나 직계가 아닌 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에도 개입하는 등 충실성을 과시했음.
73·9 김정일이 김영주의 조직비서직을 가로채고(선전비서 겸임),74·2 정치위원에 오름으로써 후계자 지위를 확고히 하였음.
한편 93·12 김영주를 평양(부주석)으로 다시 불러들인것은 김정일의 권력이 확고한 상황에서 김일성이 “저렇게 오래 버려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며 김영주는 ‘허재비’(허수아비)에 불과함.
김정일은 당 장악과정에서 전국에서 벌어진 모든 내용을 일보체계로 종합했으며 중요한 문제들이 발생할 경우에는 시·군당 이라도 당중앙위에 직접 보고하는 직보체계로 만들어 놓았음.
▷북한 정치분야◁
○독단적인 정책결정
당·정·군 등 각 조직은 계선을 통해 정기적으로 자체보고를 하고 있으나,토의 등을 통한 정책결정은 없으며 오직 김정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정책을 결정·지시함으로써 독단이 지배하는 체제임.
93년초 ‘NPT 탈퇴선언’도 사전 간부가 협의가 없었으며 향후 전쟁을 일으킬 경우에도 유·불리점에 대한 논의는 있을 것이나 ‘개전시기’는 독단적으로 결정할 것으로 예상.
김정일에게 비위를 거슬리는 내용을 보고할 경우 파직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느누구도 제대로 보고를 하지 못하며 모든 간부들은 ‘옳소 부대’이며 다만 김기남(당 선전선동 담당비서)정도가 “∼좀 했으면 합니다”라고 말할수 있는 정도에 불과함.
○권력 승계문제
3년 탈상후 당총비서와 국가주석을 승계할 것으로 보이며 총비서의 경우는 당 전원회의에서 선출할 가능성이 있음.
한편 김정일은 황장엽에게 “내가 국가주석을 하는 것이좋겠는가”라고 질문한 바 있고 김기남이 “주석제 유지를 건의하였다”는 점등으로 보아 주석직 승계여부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것 같음.
○김일성 사망… 지도층 분위기
루미나아 ‘차우세스크’처형(89.12)당시 김일성은 “군대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며 김정일을 최고사령관에 등용(91.12)한 것도 군부를 확고하게 장악하려는 의도였음.
김일성 사망시 지도부내에 불안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김정일이 그간 실질적으로 통치해 왔고 김정일 활동에 대한 ‘소감문’작성 등으로 들볶아 위기감 마저 느낄 여유를 갖지 못한 상태였음.
94.7 남북정상회담 추진시 김일성은 “내가 서울에 가면 수백만 군중이 환영할 것이므로 통일에 유리할 것”이라고 하는 등 흥분상태였으며 “연방제 통일과 남부 경제교류문제 논의”가 주목적이었음.
○북한 체제의 강·약점
<체제의 강점>
김정이 우상화가 극단적으로 강화되고 있어 주민들은 그를 신처럼 여기고 있고 충성·효성을 기본으로 하는 봉건주의 사상이 흔들리지 않고 있음.
고위간부들은 ‘도청장치와 숙청’의 공포를 느끼면서 생활하고 있어 파벌형성 소지가 없으며 아부하기에 급급함.
주민들의 반체제는 불가능하며 굶어 죽으면서도 ‘김정일 만세’를 부르는 실정임.
<체제의 취약점>
북한체제가 사회주의가 아닌 ‘현대판 봉건주의’체제라는 현실이 가장 큰 취약점임.
주민들의 ‘비사회주의 현상’이 점차 확산되고 공산주의 도덕이 땅에 떨어졌으며 관료들의 부패와 주민들의 일탈행위가 만연되고 있음.
○최근 정책 중점사항
96년초 당·군·청년보 ‘공동사설’에서 사상·군사·경제 등 소위 ‘3대 진지’강화를 촉구한 이래 이를 지속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당면한 북한의 대내외 정세가 어려운 사정임을 반영하고 있는 것임.
김정일이 ‘3대 진지’운운하며 한마디 한 것을 밑에서 체계화 한 것으로 정책노선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님.현재 사정이 어려우니까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경제진지야 엉망일지 몰라도 군사·사상진지는 튼튼하다고 할 수 있음.
‘3대혁명소조’운동은 폐지되고 ‘대학생 현실체험’으로 대체되고 있는바 최근들어 3대 혁명소조부를 폐지하는 등 흐지부지 되었으며 그대신 대학졸업후 무조건 지방의 생산현장에서 3년간 노동해야 하는 ‘대학생 현실체험’제도로 바뀌었음.‘소조운동’이 김정일의 정책추진을 뒷받침하는데 목적이 있었는데 반해 ‘현실체험’은 평양인구 분산과 주민통제에 이용하겠다는 것임.
○권력구조 재편 전망
김정일의 변덕스런 성격때문에 공식승계후 인사개편 방향에 대해 확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음.
경제일꾼들은 세대교체의 필요성이 있어 대폭교체할 것이며 지병과 고령으로 활동이 부진한 부총리들도 모두 바꿀 것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도 선거한지가 오래되어 많이 바뀔 것이며 선발기준은 김정일에 대한 충정심이 절대적인 고려 기준임.
○정권붕괴 및 타도가능성
북한은 지금 경제가 마비상태에 빠지고 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등 파탄에 직면해 있음.
그러나 북한은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실시하면서 전제주의적 통치기반을 강화해왔기 때문에 북한체제가 1∼2년내에 쉽게 무너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임.
다년간 이중 삼중의 감시하에 귀를 막고 눈을 가리운채 개인숭배교육을 받아온 북한 사람들은 독재자의 명령을 무조건 따를 뿐이며 김정일을 거부하는 세력은 있을수 없음.
○권력핵심의 동요징후
최근의 경제난·식량난 등과 관련하여 일부 간부들이 “큰일인데”라고 종종 말하고 있으나 뚜렷한 대책없이 서로 걱정만 하고 있는 실정임.
특히 고위간부들은 ‘도청장치와 숙청’에 공포를 느끼면서 생활하고 있어 김정일에게 충성경쟁을 할 뿐임.
○김정일의 건강·성격
최근 김정일의 건강은 양호한 편이며 금년 1·1 ‘금수산 기념궁전’참배시 만났을 때에도 건강에 이상징후는 보이지 않았음.
김정일은 일을 하거나 파티를 하기 위해 밤을 새는 일이 잦으며 새벽 3∼4시에 건설현장이나 행사준비장에 갑자기 나타나거나 간부들에게 전화를 하는등 거의 잠을 자지않고 일한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음.
김일성은 김정일이 포용력이 크다고 자랑하였으나 사실은 소심하며 좋고 싫은 것에 대한 감정의 변화가 지나칠 정도여서 아부하는 부하를 편애하다가도 조금이라도 의심의 소지가 생기면 내팽개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
○김정일의 호화사치 행태
본질적인 면에서는 ‘김부자’가 다 개인독재로 다를 바가 없으나 김일성은 스케일이 크고 폭이 넓어 인민들을 기만해도 무난했는데 김정일은 무계획적이며 조급함.
김일성은 정책결정시 간부들의 의견을 묻기도 했으나 김정일은 독단으로 결정하며 자기의 정책이나 노선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면 가차없이 처벌함.
김정일은 사소한 일까지도 일일이 간섭을 하여 당비서 주택을 몇층 몇호로 배정하라거나 선물을 보내는 것까지 직접함.
○김일성 권력장악 과정
김일성은 6·25전후 국내파(남로당)→연안파→소련파→빨치산내 반대세력(갑산파·군사파)의 순으로 단계적 숙청을 진행하였으며 전쟁직후 이승엽·박헌영 등 남로당 계열을 ‘간첩죄’로 몰아 전쟁책임을 덮어 씌우면서 제거하였음.
50년대 후반 김일성이 동구권을 장기 외유중(56·6∼7)최창익·윤공흠 등이 반김일성 음모를 꾸민 소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연안파·소련파를 제거하였음.
60년대 후반의 갑산파·군사파 제거에는 삼촌 김영주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김정일이 관여하기 시작하였음.
69∼70년중 허봉학·김광협 등 군사인물 숙청과정에는 김정일과 친하게 된 오진우가 주도하였고 김영주의 세력 약화가 목적이었으며 60년대말부터 김정일이 당사업에 영향력을 행사했음.
김일성은 60년대 후반의 2차례에 걸친 빨치산직계 패거리들에 대한 숙청으로 절대적 충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간부들은 김정일의눈치를 보기 시작하였음.
60년대 반대파 숙청이후 김일성 1인독재가 심화되었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여지는 말살되었음.60년대까지는 당내 토의과정에서 형식상이나마 ‘거수가결’도 행해졌으나 김정일이 70년대초 유일사상체계를 강조한 이후는 절대지지 일색이었음.
‘수령의 말씀은 곧 ‘법’으로 100% 내리먹일뿐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의한 간부들의 창발성은 허용의 여지가 없어졌음. 이때부터 김정일이 오진우를 비롯간 일부 군 간부와 함께 군대를 2배로 늘리는등 중국의 도움없이 전쟁에서 이길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아래 군국주의를 강화하였음.
○김정일의 권력장악 과정
김정일은 아동시절에는 ‘수상놀이’를 하고 학생시절에는 ‘김일성 업무에 조력’하는 등 권력 지향적 행태를 표출하였음.
어린시절 놀이하는 모습을 보면 김정일이 자신은 수상 노릇을 하고 다른 아이들은 상(장관)을 시켜놓고 호령을 하곤 했으며 청소년 시절에는 김일성의 관심사안을 연구하는 등 김일성에게 잘보이려고 무척 노력했음.
59·1 황장엽은 김부자를 수행하여 소련 공산당 21차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그때 김정일(17세)이 김일성의 일정을 주도해서 짤 정도로 맹랑한 모습을 보였음.
김정일은 중앙당 근무시작(64·6)이래 인사문제 및 숙청에 관여하고 김일성 우상화를 주도하는 등 정치력을 발휘하였음.
64·6 중앙당에 지도원으로 처음 들어와서는 놀기를 좋아해서인지 선전·예술분야의 일을 맡아 보더니 점차 사람을 끌어모으고 조직부의 인사문제에도 관여하였으며 60년대 후반 김일성이 같은 빨치산파이나 직계가 아닌 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에도 개입하는 등 충실성을 과시했음.
73·9 김정일이 김영주의 조직비서직을 가로채고(선전비서 겸임),74·2 정치위원에 오름으로써 후계자 지위를 확고히 하였음.
한편 93·12 김영주를 평양(부주석)으로 다시 불러들인것은 김정일의 권력이 확고한 상황에서 김일성이 “저렇게 오래 버려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며 김영주는 ‘허재비’(허수아비)에 불과함.
김정일은 당 장악과정에서 전국에서 벌어진 모든 내용을 일보체계로 종합했으며 중요한 문제들이 발생할 경우에는 시·군당 이라도 당중앙위에 직접 보고하는 직보체계로 만들어 놓았음.
▷북한 정치분야◁
○독단적인 정책결정
당·정·군 등 각 조직은 계선을 통해 정기적으로 자체보고를 하고 있으나,토의 등을 통한 정책결정은 없으며 오직 김정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정책을 결정·지시함으로써 독단이 지배하는 체제임.
93년초 ‘NPT 탈퇴선언’도 사전 간부가 협의가 없었으며 향후 전쟁을 일으킬 경우에도 유·불리점에 대한 논의는 있을 것이나 ‘개전시기’는 독단적으로 결정할 것으로 예상.
김정일에게 비위를 거슬리는 내용을 보고할 경우 파직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느누구도 제대로 보고를 하지 못하며 모든 간부들은 ‘옳소 부대’이며 다만 김기남(당 선전선동 담당비서)정도가 “∼좀 했으면 합니다”라고 말할수 있는 정도에 불과함.
○권력 승계문제
3년 탈상후 당총비서와 국가주석을 승계할 것으로 보이며 총비서의 경우는 당 전원회의에서 선출할 가능성이 있음.
한편 김정일은 황장엽에게 “내가 국가주석을 하는 것이좋겠는가”라고 질문한 바 있고 김기남이 “주석제 유지를 건의하였다”는 점등으로 보아 주석직 승계여부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것 같음.
○김일성 사망… 지도층 분위기
루미나아 ‘차우세스크’처형(89.12)당시 김일성은 “군대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며 김정일을 최고사령관에 등용(91.12)한 것도 군부를 확고하게 장악하려는 의도였음.
김일성 사망시 지도부내에 불안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김정일이 그간 실질적으로 통치해 왔고 김정일 활동에 대한 ‘소감문’작성 등으로 들볶아 위기감 마저 느낄 여유를 갖지 못한 상태였음.
94.7 남북정상회담 추진시 김일성은 “내가 서울에 가면 수백만 군중이 환영할 것이므로 통일에 유리할 것”이라고 하는 등 흥분상태였으며 “연방제 통일과 남부 경제교류문제 논의”가 주목적이었음.
○북한 체제의 강·약점
<체제의 강점>
김정이 우상화가 극단적으로 강화되고 있어 주민들은 그를 신처럼 여기고 있고 충성·효성을 기본으로 하는 봉건주의 사상이 흔들리지 않고 있음.
고위간부들은 ‘도청장치와 숙청’의 공포를 느끼면서 생활하고 있어 파벌형성 소지가 없으며 아부하기에 급급함.
주민들의 반체제는 불가능하며 굶어 죽으면서도 ‘김정일 만세’를 부르는 실정임.
<체제의 취약점>
북한체제가 사회주의가 아닌 ‘현대판 봉건주의’체제라는 현실이 가장 큰 취약점임.
주민들의 ‘비사회주의 현상’이 점차 확산되고 공산주의 도덕이 땅에 떨어졌으며 관료들의 부패와 주민들의 일탈행위가 만연되고 있음.
○최근 정책 중점사항
96년초 당·군·청년보 ‘공동사설’에서 사상·군사·경제 등 소위 ‘3대 진지’강화를 촉구한 이래 이를 지속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당면한 북한의 대내외 정세가 어려운 사정임을 반영하고 있는 것임.
김정일이 ‘3대 진지’운운하며 한마디 한 것을 밑에서 체계화 한 것으로 정책노선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님.현재 사정이 어려우니까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경제진지야 엉망일지 몰라도 군사·사상진지는 튼튼하다고 할 수 있음.
‘3대혁명소조’운동은 폐지되고 ‘대학생 현실체험’으로 대체되고 있는바 최근들어 3대 혁명소조부를 폐지하는 등 흐지부지 되었으며 그대신 대학졸업후 무조건 지방의 생산현장에서 3년간 노동해야 하는 ‘대학생 현실체험’제도로 바뀌었음.‘소조운동’이 김정일의 정책추진을 뒷받침하는데 목적이 있었는데 반해 ‘현실체험’은 평양인구 분산과 주민통제에 이용하겠다는 것임.
○권력구조 재편 전망
김정일의 변덕스런 성격때문에 공식승계후 인사개편 방향에 대해 확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음.
경제일꾼들은 세대교체의 필요성이 있어 대폭교체할 것이며 지병과 고령으로 활동이 부진한 부총리들도 모두 바꿀 것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도 선거한지가 오래되어 많이 바뀔 것이며 선발기준은 김정일에 대한 충정심이 절대적인 고려 기준임.
○정권붕괴 및 타도가능성
북한은 지금 경제가 마비상태에 빠지고 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등 파탄에 직면해 있음.
그러나 북한은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실시하면서 전제주의적 통치기반을 강화해왔기 때문에 북한체제가 1∼2년내에 쉽게 무너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임.
다년간 이중 삼중의 감시하에 귀를 막고 눈을 가리운채 개인숭배교육을 받아온 북한 사람들은 독재자의 명령을 무조건 따를 뿐이며 김정일을 거부하는 세력은 있을수 없음.
○권력핵심의 동요징후
최근의 경제난·식량난 등과 관련하여 일부 간부들이 “큰일인데”라고 종종 말하고 있으나 뚜렷한 대책없이 서로 걱정만 하고 있는 실정임.
특히 고위간부들은 ‘도청장치와 숙청’에 공포를 느끼면서 생활하고 있어 김정일에게 충성경쟁을 할 뿐임.
1997-07-1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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