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도읍지 오동성터에 푯말만 외로이…/일제,성터 뭉개고 대규모 공장 건립/400m 성곽 간곳없고 남은흔적 고작 80m/23개 강동괴석에 역마울음 들리고 옛 암자터에 세운 정각사만 한때 영화 말하듯
송화강은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었다.그 가운데 가장 큰 지류가 목단강이다.길림성 돈화시 목단령에서 발원한 목단강은 흑룡강성으로 접어들어 경박호에 이른다.그리고 나서 의란현 서쪽에서 흑룡강 본류와 만나는데,길이는 670㎞를 헤아렸다.당나라때는 홀한수라 불렀던 이 강은 왕조가 바뀌면 이름도 따라 바뀌었다.
청나라때 목단울라라 한 것이 목단강으로 강 이름을 굳힌 계기가 되었다.그 목단강유역은 옛 발해의 강토다.강의 상류 오동성에서 발흥한 발해는 오늘날의 영안시 동경성에서 멸망하기까지 220년 동안 찬란한 역사를 꽃피웠다.「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는 본래 고구려에 복속한 속말말갈이며,성은 대씨다.고구려가 망한 다음 그는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동모산을 지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조따라 강이름도 바뀌어그러면 동모산은 어디인가.오늘날 길림성 돈화시 현유향 성산자촌의 산이라고 한다.해발 600m밖에 안되는 산이었지만,돈화분지 넓은 평야 한 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터라 제법 웅장했다.동모산 동쪽으로 10리 안쪽에 목단강이 남으로부터 북으로 흘렀다.그리고 대석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들어와 목단강과 합류했다.이들 물줄기야말로 동모산을 지켜주는 천연의 호성하 그것이었다.
그 동모산에는 성산자산성이 있다.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그 흔적이 보였다.성은 본래 반월형으로 길이가 2천m였으나 지금은 얼마 남지않았다.동문으로 들어서자 50여기의 반움집터와 군사 조련장이었을 것이라는 넓은 마당이 나왔다.조선족 고고학자 엄장록 선생은 「연변지구 발해시기의 옛 성터 고찰」에서 이렇게 썼다.「역사기록과 지리적 위치에 근거하면 성산자산성은 대조영이 698년 진국을 세운 동모산으로 추정된다」
오동성은 오늘의 돈화시 고성거리에 있다.동모산 성산자산성을 근거로 국력을 키운 대조영이 새로 성을 쌓고 도읍을 옮긴 곳이 오동성이다.돈화임업국의 사택이 꽉 들어차서 성터를 찾는데 힘이 들었다.한참만에 사택 나무울타리에 가린 오동성유적지 팻말을 가까스로 찾아냈다.그러나 팻말 뒤쪽은 장작더미가 쌓여있는 바람에 새겨놓은 글귀는 읽어 볼 처지가 못되었다.아쉬울 뿐이었다.
오동성은 길림성의 성급보호문물로 되었다.팻말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인지 모르나,서글픈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오동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발해유적들이 종종 수난을 당했다.지난 1995년 4월에는 화룡시 서성건 북고성촌 서고성이 큰 피해를 입었다.곽보위(34·화룡시 두도건 명성촌)라는 사람이 발해의 중경 현덕부자리인 서고성 동쪽 토성벽 5㎡를 허물어 못자리판 객토로 썼다는 것이다.사실이 탄로나 5천원의 벌금을 물기는 했다.
오동성 역시 흙을 다져 쌓아올린 이른바 판축의 토성이다.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졌던 오동성은 본래 동서 400m,남북 200m에 이르는 토성이었다고 한다.지금은 겨우 80m 정도가 남아있다.그것도 성터였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들여다보아야 간신히 눈에 들어왔다.오동성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때다.일제는 성터를 뭉개버리고 대규모 목재공장을 지었다.
오동성과 동모산 성산자산성의 거리는 15㎞다.그러니까 도성과 산성이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구려 도읍지인 집안에 평지성인 국내성과 그 외곽에 산성인 환도성이 자리한 이치와 똑같다.도성과 산성을 가까이 배치한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다.발해가 오동성을 수축할 당시 당나라와의 관계는 전쟁상태였던 것이다.
연변조선족 사학계에서는 더러 오동성이 발해의 첫 도읍지가 아니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그러나 1949년 육정산에서 발해의 무덤떼가 발견되고,그 무덤의 일부는 왕실묘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오동성이 발해의 수도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킨 것이다.그리고 청나라 연호로 광서 11년인 1885년에 조정걸이 쓴 「동삼성여지도설」에서도 여러가지 지리적 여건을 감안,오동성을 수도로 보았다.
발해의 무덤떼가 나온 육정산은 돈화시에서 남쪽으로 5㎞ 떨어진 강동향 승리촌에 자리했다.동서로 6개의 봉우리가 낙타등처럼 이어졌다.해발 603m의 두번째 봉우리가 주봉이다.그 주봉 동남쪽 산길 동서 양쪽의 평지에 무덤떼가 있다.동쪽 무덤떼는 신분이 낮은 계층의 무덤이고 서쪽 무덤떼는 발해 전기에 묻힌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밝혀졌다.이 육정산 무덤떼에서 가장 유명한 무덤은 제3대 문왕인 대흠무의 둘째딸 정혜공주묘다.
○성급 보호문물로 지정,유지
정혜공주묘는 북으로 육정산 주봉을 등지고 남으로는 활짝 트인 광활한 목단강 충적평야를 바라보고 있다.그리고 강 서쪽 연안은 사원유적을 품에 끼었다.무덤에서 동모산까지는 시오리가 채 안되었다.그러고 보면 정혜공주묘는 배산임수의 좋은 땅을 차지한 것이다.1950년대 이 무덤 발굴 당시 참여했던 전 연변대 사학부 교수 방학봉선생은 정혜공주묘를 이렇게 묘사했다.「무덤은 뒤로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넓은 들을 향했다.무덤의 주인이 마치 북쪽 산에 기대고 누워 남쪽 벌판을 멀리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공주의 묘는 무덤방,무덤 안길과 바깥길로 이루어졌다.무덤방인 묘실은 네모꼴이다.무덤방 네 면의 벽은 크기가 서로 다른 용암석과 현무암을 다듬어 8∼9층 정도를 쌓아 만들었다.무덤에서는 비석·돌사자·구슬·청동못 따위의 유물이 나왔다.돌사자는 암수 한쌍이었다.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린채 앞을 바라보고 앉은 돌사자는 날쌔게 보이면서도 의젓했다.발해무덤에서 돌사자가 나온 것은 당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늘날 밖에서 볼 수 있는 발해의 유물이 있다면 24괴돌유적이다.흑룡강성에 2군데,길림성 연변지역에 6군데 남아있다.돈화시에만 3군데가 있는데,그중 하나가 강동괴석이다.돌 하나는 없어지고 지금은 23개가 남았다.목단강을 사이에 두고 오동성과 마주한 강동괴석은 강에서 동쪽으로 300m 거리에 위치했다.한 줄에 8개씩 3줄에 모두 24개의 돌을 나란히 세운 이들 돌유적은 발해시대의 역참으로 추정하고 있다.
돈화시에는 새로 지은 정각사라는 절이 있다.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이 절은 발해시대부터 광복 이전까지 명맥을 유지한 한 암자터에 다시 세운 것이다.해방 이전까지는 이씨 성을 가진 한 보살(여자신도)이 암자를지켰다고 한다.그러다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보살은 싱가포르로 가서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보살은 암자에 큰 절을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그 유언은 손자대에 이루어져 중국돈으로 2천5백만원을 들여 정각사를 세웠다는 것이다.<유연산 작가>
송화강은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었다.그 가운데 가장 큰 지류가 목단강이다.길림성 돈화시 목단령에서 발원한 목단강은 흑룡강성으로 접어들어 경박호에 이른다.그리고 나서 의란현 서쪽에서 흑룡강 본류와 만나는데,길이는 670㎞를 헤아렸다.당나라때는 홀한수라 불렀던 이 강은 왕조가 바뀌면 이름도 따라 바뀌었다.
청나라때 목단울라라 한 것이 목단강으로 강 이름을 굳힌 계기가 되었다.그 목단강유역은 옛 발해의 강토다.강의 상류 오동성에서 발흥한 발해는 오늘날의 영안시 동경성에서 멸망하기까지 220년 동안 찬란한 역사를 꽃피웠다.「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는 본래 고구려에 복속한 속말말갈이며,성은 대씨다.고구려가 망한 다음 그는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동모산을 지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조따라 강이름도 바뀌어그러면 동모산은 어디인가.오늘날 길림성 돈화시 현유향 성산자촌의 산이라고 한다.해발 600m밖에 안되는 산이었지만,돈화분지 넓은 평야 한 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터라 제법 웅장했다.동모산 동쪽으로 10리 안쪽에 목단강이 남으로부터 북으로 흘렀다.그리고 대석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들어와 목단강과 합류했다.이들 물줄기야말로 동모산을 지켜주는 천연의 호성하 그것이었다.
그 동모산에는 성산자산성이 있다.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그 흔적이 보였다.성은 본래 반월형으로 길이가 2천m였으나 지금은 얼마 남지않았다.동문으로 들어서자 50여기의 반움집터와 군사 조련장이었을 것이라는 넓은 마당이 나왔다.조선족 고고학자 엄장록 선생은 「연변지구 발해시기의 옛 성터 고찰」에서 이렇게 썼다.「역사기록과 지리적 위치에 근거하면 성산자산성은 대조영이 698년 진국을 세운 동모산으로 추정된다」
오동성은 오늘의 돈화시 고성거리에 있다.동모산 성산자산성을 근거로 국력을 키운 대조영이 새로 성을 쌓고 도읍을 옮긴 곳이 오동성이다.돈화임업국의 사택이 꽉 들어차서 성터를 찾는데 힘이 들었다.한참만에 사택 나무울타리에 가린 오동성유적지 팻말을 가까스로 찾아냈다.그러나 팻말 뒤쪽은 장작더미가 쌓여있는 바람에 새겨놓은 글귀는 읽어 볼 처지가 못되었다.아쉬울 뿐이었다.
오동성은 길림성의 성급보호문물로 되었다.팻말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인지 모르나,서글픈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오동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발해유적들이 종종 수난을 당했다.지난 1995년 4월에는 화룡시 서성건 북고성촌 서고성이 큰 피해를 입었다.곽보위(34·화룡시 두도건 명성촌)라는 사람이 발해의 중경 현덕부자리인 서고성 동쪽 토성벽 5㎡를 허물어 못자리판 객토로 썼다는 것이다.사실이 탄로나 5천원의 벌금을 물기는 했다.
오동성 역시 흙을 다져 쌓아올린 이른바 판축의 토성이다.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졌던 오동성은 본래 동서 400m,남북 200m에 이르는 토성이었다고 한다.지금은 겨우 80m 정도가 남아있다.그것도 성터였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들여다보아야 간신히 눈에 들어왔다.오동성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때다.일제는 성터를 뭉개버리고 대규모 목재공장을 지었다.
오동성과 동모산 성산자산성의 거리는 15㎞다.그러니까 도성과 산성이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구려 도읍지인 집안에 평지성인 국내성과 그 외곽에 산성인 환도성이 자리한 이치와 똑같다.도성과 산성을 가까이 배치한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다.발해가 오동성을 수축할 당시 당나라와의 관계는 전쟁상태였던 것이다.
연변조선족 사학계에서는 더러 오동성이 발해의 첫 도읍지가 아니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그러나 1949년 육정산에서 발해의 무덤떼가 발견되고,그 무덤의 일부는 왕실묘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오동성이 발해의 수도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킨 것이다.그리고 청나라 연호로 광서 11년인 1885년에 조정걸이 쓴 「동삼성여지도설」에서도 여러가지 지리적 여건을 감안,오동성을 수도로 보았다.
발해의 무덤떼가 나온 육정산은 돈화시에서 남쪽으로 5㎞ 떨어진 강동향 승리촌에 자리했다.동서로 6개의 봉우리가 낙타등처럼 이어졌다.해발 603m의 두번째 봉우리가 주봉이다.그 주봉 동남쪽 산길 동서 양쪽의 평지에 무덤떼가 있다.동쪽 무덤떼는 신분이 낮은 계층의 무덤이고 서쪽 무덤떼는 발해 전기에 묻힌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밝혀졌다.이 육정산 무덤떼에서 가장 유명한 무덤은 제3대 문왕인 대흠무의 둘째딸 정혜공주묘다.
○성급 보호문물로 지정,유지
정혜공주묘는 북으로 육정산 주봉을 등지고 남으로는 활짝 트인 광활한 목단강 충적평야를 바라보고 있다.그리고 강 서쪽 연안은 사원유적을 품에 끼었다.무덤에서 동모산까지는 시오리가 채 안되었다.그러고 보면 정혜공주묘는 배산임수의 좋은 땅을 차지한 것이다.1950년대 이 무덤 발굴 당시 참여했던 전 연변대 사학부 교수 방학봉선생은 정혜공주묘를 이렇게 묘사했다.「무덤은 뒤로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넓은 들을 향했다.무덤의 주인이 마치 북쪽 산에 기대고 누워 남쪽 벌판을 멀리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공주의 묘는 무덤방,무덤 안길과 바깥길로 이루어졌다.무덤방인 묘실은 네모꼴이다.무덤방 네 면의 벽은 크기가 서로 다른 용암석과 현무암을 다듬어 8∼9층 정도를 쌓아 만들었다.무덤에서는 비석·돌사자·구슬·청동못 따위의 유물이 나왔다.돌사자는 암수 한쌍이었다.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린채 앞을 바라보고 앉은 돌사자는 날쌔게 보이면서도 의젓했다.발해무덤에서 돌사자가 나온 것은 당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늘날 밖에서 볼 수 있는 발해의 유물이 있다면 24괴돌유적이다.흑룡강성에 2군데,길림성 연변지역에 6군데 남아있다.돈화시에만 3군데가 있는데,그중 하나가 강동괴석이다.돌 하나는 없어지고 지금은 23개가 남았다.목단강을 사이에 두고 오동성과 마주한 강동괴석은 강에서 동쪽으로 300m 거리에 위치했다.한 줄에 8개씩 3줄에 모두 24개의 돌을 나란히 세운 이들 돌유적은 발해시대의 역참으로 추정하고 있다.
돈화시에는 새로 지은 정각사라는 절이 있다.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이 절은 발해시대부터 광복 이전까지 명맥을 유지한 한 암자터에 다시 세운 것이다.해방 이전까지는 이씨 성을 가진 한 보살(여자신도)이 암자를지켰다고 한다.그러다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보살은 싱가포르로 가서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보살은 암자에 큰 절을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그 유언은 손자대에 이루어져 중국돈으로 2천5백만원을 들여 정각사를 세웠다는 것이다.<유연산 작가>
1997-04-25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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