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봄볕/박정란 방송작가(굄돌)

4월의 봄볕/박정란 방송작가(굄돌)

박정란 기자 기자
입력 1997-04-07 00:00
수정 1997-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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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로 어느새 이십년 세월을 훌렁 넘겨버렸다.원고지를 붙들고 앉아 사월이 스무번도 더 지나갔다는 이야기다.

내가 봄이라고 하지 않고 사월이라고 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1972년 사월,임신 초기의 빈혈증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나는 원고지를 붙들고 앉아 있었다.옥인동 산언덕바지에 있는 작은 우리 아파트 창밖 산에는 진달래·개나리가 색종이를 뿌려 놓은듯 했고 여름 햇살보다 더 푸짐한 햇볕이 내려 쪼이고 있었다.그 화사한 봄볕은 너무 강렬해 적막하기까지 했다.창밖의 사월은 임신으로 힘들고 원고 때문에 찌든 나에게 도리어 깊은 절망감을 주었다.창밖 저 햇볕속에 서 있을수 없다는 것은 절망이었다.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밖은 봄이 흐드러지는데 나는 시베리아로 유배를 와 있었다.그때 결심했다.화사한 햇볕과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피는 사월에는 절대로 원고를 쓰지 않을 거라고.

병적일만큼 내가 4월 병에 빠지는데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원고를 힘들고 느리게 쓰는 까닭도 있다.일주일 분 원고를 빨리 써 넘기면하루이틀이라도 창문을 열고 4월의 봄볕속으로 나올 수가 있을텐데 나는 거의 일주일 내내 원고를 붙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방을 시베리아로 만드는 4월에는 원고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방송국 사정도 있고 내 뜻대로만 되는건 아니었다.

몇년 후 강남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해서도 나는 똑같이 사월에 원고를 쓰면서 불행해 했다.이번에는 산등성이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 안에 유난히 개나리와 목련이 많았다.이층에서 다른 동의 개나리와 목련까지 훤히 내려다 보면서 나는 감옥에 있는 사람이었다.갇힌 자였다.그 감정이 어찌나 절절했던지 그때 감옥에 있는 양심수들이 쓴 책들을 모조리 사기까지 했다.아마 나의 비명이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행복한 4월을 보낼 것 같다.연속극이 2월말로 끝나 원고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1997-04-07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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