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에는 문화가 있다.문화는 인간생활의 원활한 운행을 가능하게 한다.결혼식은 문화의 일부이다.그런데 우리의 결혼식문화는 우리네 삶을 원활하게 하고 보람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피곤하게 한다.결혼절차는 혼돈과 문화 지체에 빠져있어 그것을 문화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다.
우리 결혼풍속은 전래적인 미풍양속도 아니고 새시대에 적합한 문화적 행사도 아니다.헌 것도 아니고 새 것도 아니며,우리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니다.그런 가운데 모두가 불편을 겪고 있다.결혼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탄생하고 죽는 일과 함께 인생에 있어 3대 중요 사건인데 그에 관한 문화를 이맛살이 찌푸러지게 방치해 둔 우리의 처지가 한심하다.
눈에 거슬리는 결혼식 풍경의 사례로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물론 일부의 문제다.그러나 그 일부의 문제가 결혼식문화를 타락시키는 주범이며 광범한 파급효과와 전시효과를 지닌다.
이끗과 권력을 주고받는 정략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녀의 애정은 간데 없고 이른바 조건만을 따지는 혼사에서는 혼수문제가 시끄럽게될 수밖에 없다.혼수의 분량을 놓고 벌이는 아귀다툼에서부터 우리의 부끄러운 결혼문화는 시작된다.혼수가 적다고 아내를 때려 골병을 들이는 자들까지 있다니 말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혼식을 앞두고 벌어지는 통과의례는 「함팔기」이다.사주단자 보내는 일이 돈 뜯어내는 깡패들의 행패처럼 변질되어 경사스러운 행사를 멍들게 한다.함지기가 돈을 밟고 걷는 야만적 행태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함값 시비 때문에 신부가 투신자살했다는 보도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뿌려대는 결혼식 청첩장은 공해다.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혼주로부터 청첩장을 받은 일이 적지 않다.권문세가의 혼사에 구름처럼 모여든 하객군중과 그로 인한 교통마비를 보면 역겹다.
결혼식날 예식장 풍경도 어색하고 낭비적이다.예식장의 바가지상혼은 이미 전설적이다.예식장 주변의 씀씀이가 날이 갈수록 낭비적으로 되어간다.아주 식탁을 차려 하객들을 앉히고 그 앞에서 결혼식을 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돈많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한다.의식의 정중함,경건함은 찾을 길이 없다.
의식을 진행하는 주례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종교적 의식에서 성직자들의 집전으로 강복을 받는 것은 문제될 수 없다.그러나 일반예식장에서 사회자 말고 주례가 따로 있어야 하고 그의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주례 세우기에 얽힌 이야기들도 쓴웃음을 자아낸다.혼주의 신분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높은 분」을 주례로 모시는 경쟁을 벌인다.다른 한편으로 야박해진 인심은 주례를 노동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낳고 있다.예전의 주례 모시기와는 영 다른 것이다.결혼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적 역할담당자가 아니라 잠시 품을 파는 노동자처럼 거마비 봉투나 쥐어 보내는 홀대가 흔하다.그러하니 주례 해주겠다는 사람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주례를 구하지 못해 허둥대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쓰럽고 불쌍하다.
결혼식 후 피로연은 더욱 가관이다.신랑 신부에게 온갖 해괴한 짓을 다 시켜 행사를 동물화한다.정말 망측한 일은 신부로 하여금 남자 손님들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술상머리에서 노래까지 부르게 하는 것이다.술상머리에서 술 따르고 노래하는 여자의 직업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르는가.정실부인과 술집작부를 분간하지 못하는 한심한 작태를 어찌 설명할지 난감하다.
결혼식을 인간화하는 문화 개조가 있어야겠다.기존의 피곤한 결혼식문화에 식상한 모든 국민이 개조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의례준칙과 같은 관권동원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읍·면·동의 호적담당 공무원을 결혼주재관으로 지정하여 당사자의 결혼선서·서명·신고를 받아 결혼을 성립시키는 제도를 만들어 권장하는 일은 해볼 만하다.그런 절차 다음에 신랑 신부는 각자의 형편에 맞는 피로연을 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결혼풍속은 전래적인 미풍양속도 아니고 새시대에 적합한 문화적 행사도 아니다.헌 것도 아니고 새 것도 아니며,우리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니다.그런 가운데 모두가 불편을 겪고 있다.결혼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탄생하고 죽는 일과 함께 인생에 있어 3대 중요 사건인데 그에 관한 문화를 이맛살이 찌푸러지게 방치해 둔 우리의 처지가 한심하다.
눈에 거슬리는 결혼식 풍경의 사례로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물론 일부의 문제다.그러나 그 일부의 문제가 결혼식문화를 타락시키는 주범이며 광범한 파급효과와 전시효과를 지닌다.
이끗과 권력을 주고받는 정략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녀의 애정은 간데 없고 이른바 조건만을 따지는 혼사에서는 혼수문제가 시끄럽게될 수밖에 없다.혼수의 분량을 놓고 벌이는 아귀다툼에서부터 우리의 부끄러운 결혼문화는 시작된다.혼수가 적다고 아내를 때려 골병을 들이는 자들까지 있다니 말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혼식을 앞두고 벌어지는 통과의례는 「함팔기」이다.사주단자 보내는 일이 돈 뜯어내는 깡패들의 행패처럼 변질되어 경사스러운 행사를 멍들게 한다.함지기가 돈을 밟고 걷는 야만적 행태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함값 시비 때문에 신부가 투신자살했다는 보도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뿌려대는 결혼식 청첩장은 공해다.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혼주로부터 청첩장을 받은 일이 적지 않다.권문세가의 혼사에 구름처럼 모여든 하객군중과 그로 인한 교통마비를 보면 역겹다.
결혼식날 예식장 풍경도 어색하고 낭비적이다.예식장의 바가지상혼은 이미 전설적이다.예식장 주변의 씀씀이가 날이 갈수록 낭비적으로 되어간다.아주 식탁을 차려 하객들을 앉히고 그 앞에서 결혼식을 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돈많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한다.의식의 정중함,경건함은 찾을 길이 없다.
의식을 진행하는 주례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종교적 의식에서 성직자들의 집전으로 강복을 받는 것은 문제될 수 없다.그러나 일반예식장에서 사회자 말고 주례가 따로 있어야 하고 그의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주례 세우기에 얽힌 이야기들도 쓴웃음을 자아낸다.혼주의 신분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높은 분」을 주례로 모시는 경쟁을 벌인다.다른 한편으로 야박해진 인심은 주례를 노동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낳고 있다.예전의 주례 모시기와는 영 다른 것이다.결혼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적 역할담당자가 아니라 잠시 품을 파는 노동자처럼 거마비 봉투나 쥐어 보내는 홀대가 흔하다.그러하니 주례 해주겠다는 사람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주례를 구하지 못해 허둥대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쓰럽고 불쌍하다.
결혼식 후 피로연은 더욱 가관이다.신랑 신부에게 온갖 해괴한 짓을 다 시켜 행사를 동물화한다.정말 망측한 일은 신부로 하여금 남자 손님들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술상머리에서 노래까지 부르게 하는 것이다.술상머리에서 술 따르고 노래하는 여자의 직업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르는가.정실부인과 술집작부를 분간하지 못하는 한심한 작태를 어찌 설명할지 난감하다.
결혼식을 인간화하는 문화 개조가 있어야겠다.기존의 피곤한 결혼식문화에 식상한 모든 국민이 개조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의례준칙과 같은 관권동원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읍·면·동의 호적담당 공무원을 결혼주재관으로 지정하여 당사자의 결혼선서·서명·신고를 받아 결혼을 성립시키는 제도를 만들어 권장하는 일은 해볼 만하다.그런 절차 다음에 신랑 신부는 각자의 형편에 맞는 피로연을 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996-03-09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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