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설 50돌에 돌아본 위상/문민시대 「민생·치안경찰」로 거듭나다

창설 50돌에 돌아본 위상/문민시대 「민생·치안경찰」로 거듭나다

박찬구 기자 기자
입력 1995-10-21 00:00
수정 1995-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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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공비 토벌·전후복구에 앞장서/자유당땐 「시녀」 오명… 지탄대상되기도/91년에 경찰청으로 독립… 중립성 확보

지난 반세기 한국 경찰은 시대와 정치상황에 따라 명암과 영욕이 엇갈린 발자취를 남겼다.

45년 해방과 함께 「군정경찰」로 출범한 경찰은 6·25전쟁 당시 「구국·호국경찰」로서 멸공전선과 공비토벌에 참여했다.자유당시대 4·19의거때는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속에 파출소가 습격당하는 수난도 겪었다.60년대 이후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화염병의 표적이 됐고 국민들의 민권의식이 높아지면서 인권유린과 과잉수사를 비난하는 지적도 받았다.86년 청사독립에 이어 91년 기구독립으로 개혁의 전기를 마련한 경찰은 갈수록 늘어나는 민생치안의 수요속에서 신뢰받는 경찰상을 주민 생활에 뿌리내리는데 힘을 쏟고 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구식 경찰제도와 「경찰」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때였지만 일제 식민지 통치로 경찰제도가 단절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해방 2개월뒤인 45년 10월21일 미군정청경무국으로 출범한 한국 경찰은 이듬해인 46년 1월16일 경무부로 지위가 격상되면서 조직도 확대,개편된다.3만6천여명의 적은 인원과 보잘것 없는 장비였지만 미군정 당국은 「민주경찰」 「민중의 지팡이」 「봉사와 질서」를 구호로 내걸었다.정부수립이전 과도기 성격의 경찰은 좌우익 싸움과 공산테러 등으로 어수선한 치안을 유지하고 국군창설이전 국방임무를 맡는 등 「건국경찰」의 면모를 보였다.

정부수립직후인 48년 9월2일 정부조직법이 제정되면서 경찰조직은 내무부 치안국으로 격하 조정,본격적인 「국립경찰」시대를 맞았다.

6·25 전쟁때는 국군과 함께 전선을 맡으면서 후방지원과 전시치안 임무도 동시에 수행했다.전쟁동안 3천1백61명이 희생됐지만 9만2천8백여명의 적을 사살하는 공을 세웠다.전후에는 공비토벌에 투입돼 전쟁의 상흔을 회복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53년부터 시작된 경찰관계법령의 통·폐합작업으로 비로소 경찰기구의 정비·개편과 행정합리화에 눈길을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자유당시대의 경찰은 지나친정치편향으로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특히 정권과 밀착,3·15부정선거에 개입하고 4·19의거 당시 시위군중에 발포하는 역사의 오류를 범하기에 이르렀다.그 결과 4·19의거후 중견간부급이상 4천5백여명이 숙정되는 비운을 감수해야 했다.신뢰와 권위가 실추된 경찰은 질서유지 임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경찰 중립화」가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5·16군사혁명 이후 경찰 내부에는 최고책임자에서부터 중간관리층까지 군인이 주요 보직을 장악하고 군장교출신이 경찰직에 특채되는등 부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그러나 혁명이후 60년대를 거치면서 경찰의 행정관리는 차츰 선진국의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해 경찰발전의 전환점을 맞았다.경찰본연의 임무를 찾아 「봉사경찰」 「보호경찰」로서 실질적인 국민편의 기능을 수행하는데도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66년 7월 「경찰윤리헌장」에 이어 69년 1월 「경찰공무원법」이 제정되면서 민주경찰을 지향하는 출발점과 직업공무원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제3공화국 이후 권위주의정치체제를 유지하려는 정치권의 「외풍」과 함께 북한의 도발이 격화되면서 경찰은 대공간첩섬멸과 반정부시위 진압이라는 두가지 기능에 얽매이게 된다.「민주·민생경찰」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는데는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

74년 8월15일 문세광 저격사건을 계기로 고유기능 회복과 조직 활성화 차원에서 같은해 12월 치안국이 치안본부로 승격되고 본부장 직급도 차관급으로 격상됐다.그러나 현역 육군중장이 예편,본부장으로 보임함으로써 내부에선 자성의 계기를 맞는다.

10·26사건으로 제5공화국이 들어선뒤 학생·재야의 반정부시위가 박종철군 변사사건,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면서 경찰은 국민으로부터 「체제·공안경찰」로 낙인찍힌다.

이와함께 80년대를 거치면서 강력·조직 범죄의 급증으로 국민들의 체감치안은 갈수록 악화됐고 이에 따른 민생치안 수요도 급증했다.90년 「범죄와의 전쟁」을 치른 경찰은 문민정부가 출범한 뒤에야 종래 「체제·공안경찰」의 오명을 벗고 「민생·치안경찰」로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경찰의 정치중립성에 대한 논란도 계속돼 91년 5월 경찰법 제정으로 내무부 보조기관이 아닌 외청형태의 경찰청이 발족하기에 이르렀다.경찰이 내부 인사권과 인력·장비·예산 등에 대한 독자적 기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기구독립과 더불어 기존의 「경찰윤리헌장」을 「경찰헌장」으로 개정,국민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생활경찰」상을 15만 경찰의 실천덕목으로 제시했다.올해 지방자치제 도입으로 또다시 변화와 도전의 시기를 맞은 경찰은 무엇보다 자치단체와 원만한 협조속에 주민생활의 고충을 적극 해결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박찬구 기자>
1995-10-21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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