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서 성장… 독립군 연락임무·피신 도와/대만주재 초대총영사로 한·중 우호 힘써
『대한민국의 유일한 생존의 길은 우리나라가 왜 이국의 병탄(병탄)을 당하게 됐는가하는 역사적 원인을 똑똑히 깨닫는 것이다』
이 어록은 독립운동가 석린 민필호 선생(1898년2월27일∼1963년4월14일)이 1945년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장으로 재임할 당시 미국의 임정승인을 위해 단합할 것을 촉구하면서 가진 연설가운데 일부다.
선생은 독립운동가인 형 제호선생의 영향으로 1911년 소년기때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독립운동가로 성장했다.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박달학원에 입학,박은식·신채호·조소앙 선생 등으로부터 영어·역사등을 배우면서 독립의식을 마음속에 싹틔웠다.
나중에 임정 국무총리 신규식선생의 사위가 된 선생의 가계에서는 신규식선생·형 제호선생과 선생 자신을 포함해 아들·딸·조카·사위등 모두 9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선생의 사위는 전고려대총장인 김준엽 박사다.
후에 임정의 국제승인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1921년 신규식선생의 광동중국호법정부 방문길에 수행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임정국무총리겸 외무총장인 신규식선생은 임정의 승인과 경제원조 협상문제 임무를 띠고 임정특사로서 파견된 것이다.광동호법정부는 중국총통 중산 손문선생이 이끌고 있었다.
신규식선생은 손총통과 직접 만나 임정의 호법정부 승인을 통보하고 호법정부가 임정을 승인할 것과 군사학교에 한인입학을 허용해줄 것,적당한 지역을 빌려줄 것,차관을 제공해줄 것등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손총통은 호법정부는 임정을 승인한다고 즉석에서 답변,중국이 임정을 승인한 첫 국가가 됐다.
이어 신규식선생과 함께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신규식선생이 1922년 과로로 순국하자 이동령·노백린·김구·이시영선생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마침 선생의 집은 상해 프랑스조계에 위치해 독립운동가들은 이 곳을 회동장소로 활용하곤 했다.
선생은 1932년 이봉창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을 벌인데 따라 일제헌병의 수색이 잦아지자 이 집을 동지들의 피신활동을 돕는 아지트로 사용했다.
선생은 일단 김구선생을 절강성으로 피신시켰으며 이동령선생등은 항주로 대피시켰다.
선생은 일제 때문에 상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장개석정부 특무기관의 도움으로 이름을 「임동반」으로 바꾸고 남경교통부직원으로 신분을 위장,독립군과 청년동지간의 연락임무를 수행했다.선생은 이동안 일본의 외교·군사암호 36종을 연구,해독한 공로로 중화민국 육해공군 광화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선생은 1940년 5월 김구선생과 함께 활동을 재개,임정의 판공실장·외무차장·의정원의원직을 맡아 임정의 국제적 승인등 외교와 경제활동에 헌신했다.선생은 우선 중국정부의 협조를 받아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에 있던 임정청사를 칠성강 연화지의 여관건물로 이전시키고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받도록 주선했다.
선생은 마침내 일제가 1945년8월 패망하자 임정요인의 귀국준비에 돌입,김구주석과 장개석총통과의 면담을 추진해 장총통으로부터 임정요인들의 환국을 위한 지원을 얻어냈다.
선생은 1945년 11월5일 김구주석등 임정요인들이 중국 국민당측이 제공한 비행기편으로 환국한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안전등을 위해 장개석 국민당정부와 계속 접촉했다.
선생은 1948년 모택동에 밀린 국민당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이동,1949년8월 대만주재 대한민국 초대총영사로 임명돼 2년동안 일했다.
선생은 1957년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한·중문화협회를 창설,한·중우호도모를 위해 각종 활동을 펼치다 1963년4월14일 숙환으로 서거했다.
선생은 자신의 외교경험을 모은 「한·중외교사화」등의 저서를 남겼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박재범 기자>
『대한민국의 유일한 생존의 길은 우리나라가 왜 이국의 병탄(병탄)을 당하게 됐는가하는 역사적 원인을 똑똑히 깨닫는 것이다』
이 어록은 독립운동가 석린 민필호 선생(1898년2월27일∼1963년4월14일)이 1945년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장으로 재임할 당시 미국의 임정승인을 위해 단합할 것을 촉구하면서 가진 연설가운데 일부다.
선생은 독립운동가인 형 제호선생의 영향으로 1911년 소년기때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독립운동가로 성장했다.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박달학원에 입학,박은식·신채호·조소앙 선생 등으로부터 영어·역사등을 배우면서 독립의식을 마음속에 싹틔웠다.
나중에 임정 국무총리 신규식선생의 사위가 된 선생의 가계에서는 신규식선생·형 제호선생과 선생 자신을 포함해 아들·딸·조카·사위등 모두 9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선생의 사위는 전고려대총장인 김준엽 박사다.
후에 임정의 국제승인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1921년 신규식선생의 광동중국호법정부 방문길에 수행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임정국무총리겸 외무총장인 신규식선생은 임정의 승인과 경제원조 협상문제 임무를 띠고 임정특사로서 파견된 것이다.광동호법정부는 중국총통 중산 손문선생이 이끌고 있었다.
신규식선생은 손총통과 직접 만나 임정의 호법정부 승인을 통보하고 호법정부가 임정을 승인할 것과 군사학교에 한인입학을 허용해줄 것,적당한 지역을 빌려줄 것,차관을 제공해줄 것등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손총통은 호법정부는 임정을 승인한다고 즉석에서 답변,중국이 임정을 승인한 첫 국가가 됐다.
이어 신규식선생과 함께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신규식선생이 1922년 과로로 순국하자 이동령·노백린·김구·이시영선생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마침 선생의 집은 상해 프랑스조계에 위치해 독립운동가들은 이 곳을 회동장소로 활용하곤 했다.
선생은 1932년 이봉창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을 벌인데 따라 일제헌병의 수색이 잦아지자 이 집을 동지들의 피신활동을 돕는 아지트로 사용했다.
선생은 일단 김구선생을 절강성으로 피신시켰으며 이동령선생등은 항주로 대피시켰다.
선생은 일제 때문에 상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장개석정부 특무기관의 도움으로 이름을 「임동반」으로 바꾸고 남경교통부직원으로 신분을 위장,독립군과 청년동지간의 연락임무를 수행했다.선생은 이동안 일본의 외교·군사암호 36종을 연구,해독한 공로로 중화민국 육해공군 광화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선생은 1940년 5월 김구선생과 함께 활동을 재개,임정의 판공실장·외무차장·의정원의원직을 맡아 임정의 국제적 승인등 외교와 경제활동에 헌신했다.선생은 우선 중국정부의 협조를 받아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에 있던 임정청사를 칠성강 연화지의 여관건물로 이전시키고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받도록 주선했다.
선생은 마침내 일제가 1945년8월 패망하자 임정요인의 귀국준비에 돌입,김구주석과 장개석총통과의 면담을 추진해 장총통으로부터 임정요인들의 환국을 위한 지원을 얻어냈다.
선생은 1945년 11월5일 김구주석등 임정요인들이 중국 국민당측이 제공한 비행기편으로 환국한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안전등을 위해 장개석 국민당정부와 계속 접촉했다.
선생은 1948년 모택동에 밀린 국민당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이동,1949년8월 대만주재 대한민국 초대총영사로 임명돼 2년동안 일했다.
선생은 1957년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한·중문화협회를 창설,한·중우호도모를 위해 각종 활동을 펼치다 1963년4월14일 숙환으로 서거했다.
선생은 자신의 외교경험을 모은 「한·중외교사화」등의 저서를 남겼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박재범 기자>
1995-04-06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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