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첫 관문… 삼남 물산 집산지/김포·강화 길목 군사요충지… 「제진」 주둔/천주교신자 8천명 처형당한 “순교성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과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 양화진은 지금의 양화대교북단과 당산철교북단 사이의 절두산 아래에 있었다.
당시 도성을 빠져나온 사람들을 김포·강화로 이어주던 양화진은 나루터 바로 위쪽의 잠두봉과 강 건너편의 선유봉,또 이 봉우리를 돌아나가는 한강의 돛단배 모습이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할 정도로 그 경치가 빼어났다.『기내의 경치로는 한강에서 제일인데 누대가 높이 구름을 막고 물이 푸르러 거울이 뜬 모양 같으며 물산이 번성하여 옷의 옷깃과 같이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동국여지승람」은 양화진을 묘사한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문인들은 양화나루를 찾아 시문을 남겼다.문인 강희맹의 「양화답설」과 진경산수화의 거목 겸제 정선의 양화진그림이 그러하다.
양화나루는 서강나루·마포나루·노들나루등과 마찬가지로 뱃길을 이용,삼남에서 올라오는 각종 물산의 집산지였다.특히 한강하류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첫 관문으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이에따라 양화나루에는 나라에 바쳐지는 세곡이라든가 여러가지 물자를 보관하는 광흥창과 조선조 3등급에 해당하는 병영인 「제진」이 있었다.
양화나루가 한강의 하류에 있던 관계로 이 일대에서는 고래가 잡히기도 했다.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머리 뒤에 코가 있고 길이가 한길이나 되는 이름모를 하얀 생선이 잡혀 구경거리가 됐다」고 기록한다.여기에서 하얀 생선은 돌고래로 추정된다.실제로 1922년에는 6척가량 되는 고래가 한강에서 잡혀 이를 한강인도교변에 묻어주어 이곳을 고래무덤이라고 불렀다.
평화롭기만 하던 양화나루는 대원군이 집권하면서부터 사건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대원군은 고종 3년(1866) 봄 양이로 물들여진 산하를 서학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면서 8천명이 넘는 천주교신자를 당시 잠두봉에서 처형했다.잠두봉이라는 이름은 봉우리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다는 것에서 유래됐다.잠두봉은 이후 천주교신자들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고 해서 절두산으로고쳐 불렀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절두산에 들어선 절두산기념관은 1966년 병인순교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순례성당과 성인 27위의 유해를 모신 지하묘가 있다.지난 84년5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한국방문 첫날 이곳을 찾았을 정도로 한국천주교의 순교성지로 서울의 명소가 됐다.또 연산군 때는 생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이 부관참시를 당했고 고종때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상해로 건너간 뒤 살해된 풍운아 김옥균의 시신이 도착한 곳도 양화진이다.
특히 중국은 김옥균의 시신을 송환할 때 조정에 김의 시신에 더 이상 형벌을 가하지 말도록 했으나 조정은 이를 묵살하고 대역부도옥균이라는 커다란 깃발을 내걸고 김옥균을 이곳에다 효수했다.
임오군란 뒤 청과 일본 상인들이 이곳에 가게를 벌이고 장사를 해 외국인들이 붐비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이던 양화나루.지금 이곳은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지날 정도로 서울의 관문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한강우기자>
서울 마포구 합정동과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 양화진은 지금의 양화대교북단과 당산철교북단 사이의 절두산 아래에 있었다.
당시 도성을 빠져나온 사람들을 김포·강화로 이어주던 양화진은 나루터 바로 위쪽의 잠두봉과 강 건너편의 선유봉,또 이 봉우리를 돌아나가는 한강의 돛단배 모습이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할 정도로 그 경치가 빼어났다.『기내의 경치로는 한강에서 제일인데 누대가 높이 구름을 막고 물이 푸르러 거울이 뜬 모양 같으며 물산이 번성하여 옷의 옷깃과 같이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동국여지승람」은 양화진을 묘사한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문인들은 양화나루를 찾아 시문을 남겼다.문인 강희맹의 「양화답설」과 진경산수화의 거목 겸제 정선의 양화진그림이 그러하다.
양화나루는 서강나루·마포나루·노들나루등과 마찬가지로 뱃길을 이용,삼남에서 올라오는 각종 물산의 집산지였다.특히 한강하류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첫 관문으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이에따라 양화나루에는 나라에 바쳐지는 세곡이라든가 여러가지 물자를 보관하는 광흥창과 조선조 3등급에 해당하는 병영인 「제진」이 있었다.
양화나루가 한강의 하류에 있던 관계로 이 일대에서는 고래가 잡히기도 했다.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머리 뒤에 코가 있고 길이가 한길이나 되는 이름모를 하얀 생선이 잡혀 구경거리가 됐다」고 기록한다.여기에서 하얀 생선은 돌고래로 추정된다.실제로 1922년에는 6척가량 되는 고래가 한강에서 잡혀 이를 한강인도교변에 묻어주어 이곳을 고래무덤이라고 불렀다.
평화롭기만 하던 양화나루는 대원군이 집권하면서부터 사건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대원군은 고종 3년(1866) 봄 양이로 물들여진 산하를 서학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면서 8천명이 넘는 천주교신자를 당시 잠두봉에서 처형했다.잠두봉이라는 이름은 봉우리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다는 것에서 유래됐다.잠두봉은 이후 천주교신자들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고 해서 절두산으로고쳐 불렀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절두산에 들어선 절두산기념관은 1966년 병인순교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순례성당과 성인 27위의 유해를 모신 지하묘가 있다.지난 84년5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한국방문 첫날 이곳을 찾았을 정도로 한국천주교의 순교성지로 서울의 명소가 됐다.또 연산군 때는 생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이 부관참시를 당했고 고종때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상해로 건너간 뒤 살해된 풍운아 김옥균의 시신이 도착한 곳도 양화진이다.
특히 중국은 김옥균의 시신을 송환할 때 조정에 김의 시신에 더 이상 형벌을 가하지 말도록 했으나 조정은 이를 묵살하고 대역부도옥균이라는 커다란 깃발을 내걸고 김옥균을 이곳에다 효수했다.
임오군란 뒤 청과 일본 상인들이 이곳에 가게를 벌이고 장사를 해 외국인들이 붐비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이던 양화나루.지금 이곳은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지날 정도로 서울의 관문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한강우기자>
1994-10-0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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