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연속성」 북이 어떻게 조절할지 관심
지난 며칠동안 우리나라는 마치 김일성의 사망 이외에는 세상에 중요한 일이 없는 것처럼 온통 모든 관심이 이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었다.온갖 추측과 예상들이 난무하는 사이에도 정작 앞으로의 남북관계나 통일에 관한 착실한 의견의 합일점은 도출되지 않은 셈이다.
이것은 물론 지난 반세기에 걸쳐서 김일성이 차지해온 중요성에 비추어본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어 있는 것이고 김일성의 죽음은 오랫동안 예상되어오던 것이 아니겠는가.특히 남북한의 정부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만큼 대비 또한 게을리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죽음이 돌발적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또 그 시기에 공교로운 면이 있었을지라도 우리의 반응은 정부나 일반시민이거나를 막론하고 좀더 차분할 수 없었겠는가.「차분하다」는 것은 물론 반응이 그저 물 끓듯하지 않고 가라앉는 듯하면서도 멀리 보면서 실속이 있어야한다는 뜻이다.
먼저 북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김일성의 죽음은 북한체제의 변화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어떤 체제이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변화함으로써만 그 기본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다.그리고 북한의 정상권력층이 지난 20여년에 걸쳐 「부자세습」의 말을 들으면서 주의를 기울여온 것이 바로 김일성이후에 그 독특한 체제를 어떻게 유지하는가 하는 문제이었다.말하자면 「변화와 연속성」의 완급을 새로운 지도체제가 조절하는 문제이었을 것이다.
둘째로 따지고 보면 북한체제나 대외정책변화는 김일성의 생존시에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마찬가지로 남한의 내부나 남북한관계의 기본적 성격도(적어도 우리의 고정관념보다는 훨씬 더 빨리) 현실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겪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요체는 한마디로 양체제 사이의 「모순·대립·갈등·경쟁」의 제양상에 겹쳐서 「공존·화해·교류·협력」의 양상이 부상한다는 것이다.이것은 단순한 평면적인 이야기가 아니다.예를 들어서 이것은 남북한간에 갈등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다.남북한간은은 여전히 갈등의 관계이며 이것이 「협력」이나 「화해」보다 더 두드러진 양상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대립이나 갈등 또는 경쟁의 관계라고 하여서 반드시 협동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평면적인 사고의 소치다.때로는 갈등이나 대립에서 전체적으로 차원 높은 성취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사이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전반적인 발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남북한관계나 궁극적으로 통일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입체적 사고」일 것이다.남북한은 각기 자기들의 단순한 생각대로 쉽게 통일을 이룰 수 없으며 화합을 할 수도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립과 갈등과 함께 화해와 교류,그리고 협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러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우리가 비록 사건들의 와중에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농지개혁이나 경제발전,민주화… 등을 비교적 빨리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북한의 위협」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개혁과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면 체제전체가 이 위협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그 반면에 항상 우리를 「위협」해온 북한은 그만큼 정체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다.이것은 다른 모든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특히 양측의 지도층이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점이라고 여긴다.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현재 북한은 전형적으로 「왕은 죽었다.전하만세」의 예다.변화속의 연속,그리고 연속속의 변화가 당분간 남북한관계에 기본적인 틀이다.그러나 우리들의 생각이나 처신은 적어도 지금까지보다는 좀더 창의적이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이어야 한다.<경희대 교수·정박>
지난 며칠동안 우리나라는 마치 김일성의 사망 이외에는 세상에 중요한 일이 없는 것처럼 온통 모든 관심이 이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었다.온갖 추측과 예상들이 난무하는 사이에도 정작 앞으로의 남북관계나 통일에 관한 착실한 의견의 합일점은 도출되지 않은 셈이다.
이것은 물론 지난 반세기에 걸쳐서 김일성이 차지해온 중요성에 비추어본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어 있는 것이고 김일성의 죽음은 오랫동안 예상되어오던 것이 아니겠는가.특히 남북한의 정부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만큼 대비 또한 게을리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죽음이 돌발적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또 그 시기에 공교로운 면이 있었을지라도 우리의 반응은 정부나 일반시민이거나를 막론하고 좀더 차분할 수 없었겠는가.「차분하다」는 것은 물론 반응이 그저 물 끓듯하지 않고 가라앉는 듯하면서도 멀리 보면서 실속이 있어야한다는 뜻이다.
먼저 북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김일성의 죽음은 북한체제의 변화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어떤 체제이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변화함으로써만 그 기본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다.그리고 북한의 정상권력층이 지난 20여년에 걸쳐 「부자세습」의 말을 들으면서 주의를 기울여온 것이 바로 김일성이후에 그 독특한 체제를 어떻게 유지하는가 하는 문제이었다.말하자면 「변화와 연속성」의 완급을 새로운 지도체제가 조절하는 문제이었을 것이다.
둘째로 따지고 보면 북한체제나 대외정책변화는 김일성의 생존시에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마찬가지로 남한의 내부나 남북한관계의 기본적 성격도(적어도 우리의 고정관념보다는 훨씬 더 빨리) 현실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겪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요체는 한마디로 양체제 사이의 「모순·대립·갈등·경쟁」의 제양상에 겹쳐서 「공존·화해·교류·협력」의 양상이 부상한다는 것이다.이것은 단순한 평면적인 이야기가 아니다.예를 들어서 이것은 남북한간에 갈등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다.남북한간은은 여전히 갈등의 관계이며 이것이 「협력」이나 「화해」보다 더 두드러진 양상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대립이나 갈등 또는 경쟁의 관계라고 하여서 반드시 협동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평면적인 사고의 소치다.때로는 갈등이나 대립에서 전체적으로 차원 높은 성취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사이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전반적인 발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남북한관계나 궁극적으로 통일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입체적 사고」일 것이다.남북한은 각기 자기들의 단순한 생각대로 쉽게 통일을 이룰 수 없으며 화합을 할 수도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립과 갈등과 함께 화해와 교류,그리고 협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러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우리가 비록 사건들의 와중에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농지개혁이나 경제발전,민주화… 등을 비교적 빨리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북한의 위협」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개혁과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면 체제전체가 이 위협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그 반면에 항상 우리를 「위협」해온 북한은 그만큼 정체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다.이것은 다른 모든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특히 양측의 지도층이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점이라고 여긴다.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현재 북한은 전형적으로 「왕은 죽었다.전하만세」의 예다.변화속의 연속,그리고 연속속의 변화가 당분간 남북한관계에 기본적인 틀이다.그러나 우리들의 생각이나 처신은 적어도 지금까지보다는 좀더 창의적이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이어야 한다.<경희대 교수·정박>
1994-07-13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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