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밤 광통교엔 다리밟기 인파/고려때 전래… 밤새도록 “액막이 긴행렬”/삼문밖아현 편갈라 만리현서 돌싸움
한양의 정월 대보름 밤은 장안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다리밟기」(답교)행렬로 절정을 이루었다.쟁반같은 둥근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도성의 남녀들은 운종가(종로)의 종루로 몰려들어 인경소리를 들은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밤이 깊도록 다리를 밟았다.
「이날 다리(교)를 밟으면 한햇동안 다리(각)의 병을 앓지않고 건강하게 지낼수 있으며 액운도 면할 수 있다」는 민속신앙에서 출발한 다리밟기는 고려때부터 정월 보름을 전후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으나 한양과 그 주변일대가 가장 대표적인 중심지였다.특히 광통교(지금의 광교부근)와 수표교(청계천2가부근)주위는 몰려 나온 도성안 백성들로 크게 붐볐으며 밀려드는 인파로 3일동안 계속될 때도 적지 않았다.이날만은 도성의 통금이 해제될 정도로 다리밟기의 참여도는 높았다.
지금의 석촌동일대에선 한달 내내 다리를 밟았으며 마포·노량진·살곶이다리·장안동·뚝섬·송파일대에선탈춤과 농악놀이·무동춤이 어우러진 신명하는 축제의 한마당을 벌였다.
옛 기록들은 『자신의 나이대로 또는 12달을 상징해 12개의 다리를 밟으려는 사람들의 긴 행렬이 밤을 지새웠다』고 적고 있다.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녀자들도 장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채 외간 남자들과 줄을 서서 극성맞게 다리를 밟았다.때문에 풍기문란시비가 일어 한때 법으로 금지한 일도 있었다.
사대문 안팎에서 유행했던 「편싸움」도 다리밟기와 함께 한양의 대표적인 놀이로 꼽힌다.일명 「돌싸움」(석전)으로 불린 이 놀이 역시 정월 보름을 전후해 성행됐다.마을과 마을,지역과 지역간에 집단적으로 행해진 편싸움은 하천을 사이에 두거나 서로 백여보가량 떨어진채 상대방에 돌을 던지며 상대방의 진지로 쳐들어가 상대편 마을어귀에 서 있는 당나무까지 도달하면 승부가 갈렸다.돌은 밤알보다는 작아야 했고 상대방의 눈동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는 돌을 던지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이를 어긴자는 그 지역에서 따돌림당하는 사회질서교육기능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아침무렵 열서너살 안팎의 어린아이들의 편싸움으로 시작돼 정오무렵 젊은이들의 대결로 이어져 하루종일 진행됐다.저녁무렵엔 돌에 맞아 벌겋게 부어오른 이마의 상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상대편과 어울려 잔치판을 벌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경도잡지는 『삼문(동·서·남대문)밖과 아현(아현동일대)사람들이 때를 이루어 패를 나눈다음 만리현(공동덕동부근)에서 돌 던지고 고함자르며 달려들어 석전을 벌인다.삼문밖편이 이기면 경기도에, 아현쪽이 이기면 다른 도에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는데 용산과 마포쪽 젊은이 작당해 아현쪽을 돕는게 상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중상자가 속출했던 이노리는 4대문 4소문 안팎과 만리현·우수현(도동∼후암동부근 )등에서 가장 성행했다..
고구려,신라등에서 연원을 찾을수 있는 편싸움은 집단의식을 드높인다는 이유로 일제에의해 금지되기도 했다.
재담과 창등이 결합된 가면극의 하나인 「산대놀이」도 당시 한양에서 성행했다.32개탈이 어우러져 12마당을 이루는 송파산대놀이가 대표적이었으며 구파발,노량진,애오개(아현동일대)등도 산대놀이패가 거주하면서 정월대보름,사월초파일,단오,칠월백중등에 「장」을 열어 인기를 끌었다.굿중패,남사당패라 불리는 직업 유랑연예인들에 의해 공연됐던 전통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일명 박첨지놀음·홍동지놀음)도 사대문안 사람들의 인기를 모았다.
조선이 유교를 숭상했지만 사월초파일에 등을 켜서 복을 비는 관등놀이는 고려때의 연등회를 이어 커다란 민속놀이로 지켜져 왔다.용,봉황,표범,물고기,학등 갖가지 모양의 등을 만들어 종로등 각 시장에 달았고 여염집에서도 등을 달아놓고 복을 빌었다.<이석우기자>
한양의 정월 대보름 밤은 장안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다리밟기」(답교)행렬로 절정을 이루었다.쟁반같은 둥근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도성의 남녀들은 운종가(종로)의 종루로 몰려들어 인경소리를 들은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밤이 깊도록 다리를 밟았다.
「이날 다리(교)를 밟으면 한햇동안 다리(각)의 병을 앓지않고 건강하게 지낼수 있으며 액운도 면할 수 있다」는 민속신앙에서 출발한 다리밟기는 고려때부터 정월 보름을 전후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으나 한양과 그 주변일대가 가장 대표적인 중심지였다.특히 광통교(지금의 광교부근)와 수표교(청계천2가부근)주위는 몰려 나온 도성안 백성들로 크게 붐볐으며 밀려드는 인파로 3일동안 계속될 때도 적지 않았다.이날만은 도성의 통금이 해제될 정도로 다리밟기의 참여도는 높았다.
지금의 석촌동일대에선 한달 내내 다리를 밟았으며 마포·노량진·살곶이다리·장안동·뚝섬·송파일대에선탈춤과 농악놀이·무동춤이 어우러진 신명하는 축제의 한마당을 벌였다.
옛 기록들은 『자신의 나이대로 또는 12달을 상징해 12개의 다리를 밟으려는 사람들의 긴 행렬이 밤을 지새웠다』고 적고 있다.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녀자들도 장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채 외간 남자들과 줄을 서서 극성맞게 다리를 밟았다.때문에 풍기문란시비가 일어 한때 법으로 금지한 일도 있었다.
사대문 안팎에서 유행했던 「편싸움」도 다리밟기와 함께 한양의 대표적인 놀이로 꼽힌다.일명 「돌싸움」(석전)으로 불린 이 놀이 역시 정월 보름을 전후해 성행됐다.마을과 마을,지역과 지역간에 집단적으로 행해진 편싸움은 하천을 사이에 두거나 서로 백여보가량 떨어진채 상대방에 돌을 던지며 상대방의 진지로 쳐들어가 상대편 마을어귀에 서 있는 당나무까지 도달하면 승부가 갈렸다.돌은 밤알보다는 작아야 했고 상대방의 눈동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는 돌을 던지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이를 어긴자는 그 지역에서 따돌림당하는 사회질서교육기능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아침무렵 열서너살 안팎의 어린아이들의 편싸움으로 시작돼 정오무렵 젊은이들의 대결로 이어져 하루종일 진행됐다.저녁무렵엔 돌에 맞아 벌겋게 부어오른 이마의 상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상대편과 어울려 잔치판을 벌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경도잡지는 『삼문(동·서·남대문)밖과 아현(아현동일대)사람들이 때를 이루어 패를 나눈다음 만리현(공동덕동부근)에서 돌 던지고 고함자르며 달려들어 석전을 벌인다.삼문밖편이 이기면 경기도에, 아현쪽이 이기면 다른 도에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는데 용산과 마포쪽 젊은이 작당해 아현쪽을 돕는게 상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중상자가 속출했던 이노리는 4대문 4소문 안팎과 만리현·우수현(도동∼후암동부근 )등에서 가장 성행했다..
고구려,신라등에서 연원을 찾을수 있는 편싸움은 집단의식을 드높인다는 이유로 일제에의해 금지되기도 했다.
재담과 창등이 결합된 가면극의 하나인 「산대놀이」도 당시 한양에서 성행했다.32개탈이 어우러져 12마당을 이루는 송파산대놀이가 대표적이었으며 구파발,노량진,애오개(아현동일대)등도 산대놀이패가 거주하면서 정월대보름,사월초파일,단오,칠월백중등에 「장」을 열어 인기를 끌었다.굿중패,남사당패라 불리는 직업 유랑연예인들에 의해 공연됐던 전통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일명 박첨지놀음·홍동지놀음)도 사대문안 사람들의 인기를 모았다.
조선이 유교를 숭상했지만 사월초파일에 등을 켜서 복을 비는 관등놀이는 고려때의 연등회를 이어 커다란 민속놀이로 지켜져 왔다.용,봉황,표범,물고기,학등 갖가지 모양의 등을 만들어 종로등 각 시장에 달았고 여염집에서도 등을 달아놓고 복을 빌었다.<이석우기자>
1994-02-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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