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12·125·18 맥락서 재평가/“기념할 가치있나” 공식행사 전무
6·29 6주년을 맞는 여권의 입장은 1년 전과 확연히 다르다.6공 시절 매년 어김없이 계속됐던 공식기념행사는 어느 한 곳에서도 거행되지 않는다.오히려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실정이다.6공과 문민정부의 차별화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이다.
개혁의 바람속에 6·29에 대한 재조명도 거의 마무리된 것과 다름없다.새정부는 5·16,12·12,5·18등과 유사한 맥락에서 6·29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한마디로 6·29는 6·10항쟁의 부산물이라는 시각이다.『국민의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과』로 보고 있다.문민정부 탄생의 기반은 광주 민주화운동과 6·10항쟁에 있다고 이미 규정해 놓은 상태이다.6·10의 역사적 가치가 부각될 수록 6·29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퇴색할 수 밖에 없다.
여권은 그러나 6·10과 마찬가지로 6·29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평가는 유보하겠다는 입장이다.6·10의 경우,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는 사회 일각의 움직임에 대해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자세를 견지했다.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6공에 대한 배려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상황이 이런 만큼 6공 한때 논란이 됐던 6·29의 주체가 누구냐는 시비도 이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이 문제를 놓고 5공과 6공 세력간에 시비가 벌어졌을 당시 5공인사들은 「6·29는 전두환대통령의 작품」이라며 구체적 자료까지 흘리기도 했다.「노태우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이라는 데 대해 제동을 건것이다.이에 대해 노전대통령측은 누가 그것을 구체화 시켰느냐가 중요하다고 맞섰다.당시로서는 상상키 어려운 대통령직선제 개헌안등을 받아들여 실천에 옮긴 당사자가 노전대통령이라는 논리였다.그러나 문민시대를 맞아 6·29선언이 지니는 무게는 급격히 감소됐다.그만큼 여론의 주목을 받기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노전대통령도 재임중 6·29문제에 대해 언급할 때면 「국민에 대한 항복선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탄생 배경이 국민적 민주화 열망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한 것도 사실이다.노전대통령은 재임중 선언의 8개항 가운데 지방자치의 미진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완수했다고 평가하고 이를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겼다.실제로 6공의 통치철학은 6·29선언이었다.
6·29 6주년을 맞는 노전대통령의 심정은 착잡할 수 밖에 없다.6·29선언에 의거,민주화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종전의 평가가 점차 힘을 잃어가는 것이 현실이다.율곡사업에 대한 감사등과 관련,새정부의 개혁작업이 6공의 실정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한 측근인사는 다만 『6·29가 있었기에 6·10이 부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노전대통령은 29일 하오 6·29 선언에 간여한 인사들을 비롯,측근인사 10여명과 함께 시내 음식점에서 조촐한 기념만찬을 가질 예정이다.참석인사는 정해창 최석립 김중권 이춘구 안무혁 현홍주 이병기 이진씨 등이다.<김명서기자>
6·29 6주년을 맞는 여권의 입장은 1년 전과 확연히 다르다.6공 시절 매년 어김없이 계속됐던 공식기념행사는 어느 한 곳에서도 거행되지 않는다.오히려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실정이다.6공과 문민정부의 차별화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이다.
개혁의 바람속에 6·29에 대한 재조명도 거의 마무리된 것과 다름없다.새정부는 5·16,12·12,5·18등과 유사한 맥락에서 6·29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한마디로 6·29는 6·10항쟁의 부산물이라는 시각이다.『국민의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과』로 보고 있다.문민정부 탄생의 기반은 광주 민주화운동과 6·10항쟁에 있다고 이미 규정해 놓은 상태이다.6·10의 역사적 가치가 부각될 수록 6·29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퇴색할 수 밖에 없다.
여권은 그러나 6·10과 마찬가지로 6·29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평가는 유보하겠다는 입장이다.6·10의 경우,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는 사회 일각의 움직임에 대해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자세를 견지했다.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6공에 대한 배려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상황이 이런 만큼 6공 한때 논란이 됐던 6·29의 주체가 누구냐는 시비도 이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이 문제를 놓고 5공과 6공 세력간에 시비가 벌어졌을 당시 5공인사들은 「6·29는 전두환대통령의 작품」이라며 구체적 자료까지 흘리기도 했다.「노태우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이라는 데 대해 제동을 건것이다.이에 대해 노전대통령측은 누가 그것을 구체화 시켰느냐가 중요하다고 맞섰다.당시로서는 상상키 어려운 대통령직선제 개헌안등을 받아들여 실천에 옮긴 당사자가 노전대통령이라는 논리였다.그러나 문민시대를 맞아 6·29선언이 지니는 무게는 급격히 감소됐다.그만큼 여론의 주목을 받기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노전대통령도 재임중 6·29문제에 대해 언급할 때면 「국민에 대한 항복선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탄생 배경이 국민적 민주화 열망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한 것도 사실이다.노전대통령은 재임중 선언의 8개항 가운데 지방자치의 미진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완수했다고 평가하고 이를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겼다.실제로 6공의 통치철학은 6·29선언이었다.
6·29 6주년을 맞는 노전대통령의 심정은 착잡할 수 밖에 없다.6·29선언에 의거,민주화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종전의 평가가 점차 힘을 잃어가는 것이 현실이다.율곡사업에 대한 감사등과 관련,새정부의 개혁작업이 6공의 실정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한 측근인사는 다만 『6·29가 있었기에 6·10이 부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노전대통령은 29일 하오 6·29 선언에 간여한 인사들을 비롯,측근인사 10여명과 함께 시내 음식점에서 조촐한 기념만찬을 가질 예정이다.참석인사는 정해창 최석립 김중권 이춘구 안무혁 현홍주 이병기 이진씨 등이다.<김명서기자>
1993-06-29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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