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연해지는 섣달 그믐께(박갑천칼럼)

처연해지는 섣달 그믐께(박갑천칼럼)

박갑천 기자 기자
입력 1993-01-20 00:00
수정 1993-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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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그 다음 생전의 대원군으로 되돌아가 『우­위­! 내일 모레면 섣달 그믐이라는 대목이었다』로 이어져 간다.

그는 취중에도 『모레가 그믐이라,떡쌀이나 있나?』고 자문한다.『몰려올 빚쟁이도 피할 겸 부인에게 맹세도 한 체면상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과세의 준비를 좀 해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날이다』.시대는 흘렀지만 오늘(20일)이 바로 대원군이 취중에 대목 걱정을 했던 그 날.모레 22일이 섣달 그믐날(물론 음력)이 아닌가.

권문 팽경장의 집 사랑에서 수모를 당한 끝에 대제학 김병학으로부터 뜻밖의 후대를 받게 되는 대원군.그 당시와 지금과는 섣달 그믐께의 의미하며 풍속도도 많이 달라졌다.특별한 경우 말고는 떡쌀 걱정을 하는 집안이 얼마나 되겠는가.그렇기는 하지만 연날리기 등 지켜져 내려오던 갖가지 민속은 많이 스러졌다.조상 생각하는 마음의 비중이 예 같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그래도 온 국토가 들썩이는 「민족의 대이동」은 그 생각의 가닥을잇는 섭새김질이라고 할 것이다.

예나 이제나 달라질 수 없는 것은 처연해지는 마음들 아닐는지.내일 모레가 지나면 나이테를 하나 더 얹게 된다는 생각과 품속으로 파고드는 계절의 한기가 사람들을 감상(감상)에 젖어들게 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보통 사람도 그런 터에 한을 품고 전국을 유랑하던 시인 김삿갓(김립)의 감회는 더욱더 남달랐다고 할 것이다.어느 해였던가.그도 섣달 그믐날 밤에 고향을 생각했다.그러면서 「고향생각」이라는 칠언율시를 읊고 있다.­『서행하여 이미 지난 열두 고을/이곳에서 떠나기 섭섭하여 머물러 있네/눈비 속의 고향을 한밤중 나그네는 생각하노니/산하그것부터가 천추의 여로(역려)아니던가/비분강개하여 역사상 위업을 말하지들 말라/영웅호걸도 백발 앞에선 탄성을 발했나니/여관방 외로운 등불 아래 한 해를 보내면서/꿈속에서나마 잠시 고향땅 구경해 볼거나』(원문 생략:김삿갓 연구가 김응수번역).귀밑머리 하얘져서의 세밑이었던 듯하다.

마루·방·외양간·부엌에 하다못해 측간(변소)에까지 등불을 켜놓고서 닭이 울 때까지 자지 못했던 섣달 그믐날 밤.이미 머리털과 수염이 하얗던 외할아버지는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셨다.자지 않으려고 하다가 깜박 잠이 들어 버렸고 흔들어 깨워서 일어나 거울을 보았더니 눈썹이 할아버지 수염보다 더 세어 있어서 울었던 일이 어제런듯 새롭다.쌀가루를 묻혔던 때문이다.눈썹까지 세지는 않았지만 하얘진 머리칼로 또 한번의 섣달 그믐을 맞는다.그 섣달 그믐날 밤이 「내일 모레」다.<서울신문 논설위원>
1993-01-20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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