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서관협회가 주관하고 있는 독서주간의 올해 주제는 「정신적 뿌리,우리 고전을 읽자」이다.이와 함께 대한출판문화협회가 개최하는 「92서울도서전」의 주제는 「책과 함께 미래사회를 위하여」이다.9월과 10월에 걸쳐 해마다 해오는 독서장려행사들이지만 올해 주제들은 우리의 책 읽기에 대한 과거로부터 미래까지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케 하는 계기를 준다.
좋은 책,특히 고전을 읽자라는 말에 누구도 반대할 사람은 없다.그러나 우리의 고전읽기는 실상 외국고전에 편중돼 있다.우리의 고전들은 서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평균적인 국민이 교양으로 읽을수 있을만큼 잘 만들어진 판본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삼국유사」만 해도 전문가가 읽을 텍스트는 있지만 보통사람이 쉽게 볼만한 판본을 찾기는 어렵다.이점에서는 「춘향전」마저도 같은 입장이다.이 때문에 책을 읽자라고 하는 권유는 때로 실제로 어떤 책을 읽자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미래의 삶을 위해서도 책읽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옳은 견해이다.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정보화사회는 간혹 책의 효용은 이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착각을 일으키기는 한다.그러나 책은 매체로만 기능해 왔던 물체가 아니다.책이라는 형식 그 자체가 독립된 인간의 창조물이다.내 손에 쥐고 지면위에서 읽기를 한다는 일은,컴퓨터화면에서 읽기를 한다는 일과는 전혀 다른 문화감수성의 행위이다.때문에 기능적 정보자료들로 이루어진 책들은 축소될수 있으나 교양적 사색과 사상적 지주의 내용으로서의 책들은 오히려 고품위제품으로서 그 생명력에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을것 이라는데 모두들 동의하고 있다.
책읽기는 그러므로 여전히 강조되어야 한다.그러나 책읽기를 위한 사회적체제 속에서의 여건조성은 책을 읽자라는 구호적 권장만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좋은 책의 전달체계가 있어야 한다.우리는 이 전달구조를 이상하게도 평균 10평미만의 소형서점 단일채널로 운영해 오고 있다.그래서 지금 책은 「정가는 5천원쯤 되고 마진율은 30%가 돼야 하며 점두에서 매기가 계속되는 책」들만이 서점에 비치된다.우선 서점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수준의 책들보다 더 읽을만 하고 더 많은 책들은 어디엔가 전시할만한 거점조차 얻고 잊지 못하다.책은 제작되지만 창고에서 썩는다.
보다 잘 책읽기를 도와주는 공공도서관 역할 역시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연간 도서자료구입비가 백만원대에 있는 공공도서관마저 수십군데나 된다.그런가하면 도서구입비 예산증액 노력은 해마다 변함이 없이 좌절된다.이제는 책만이 아니라 비디오와 오디오자료도 공공도서관이 보유해야 한다는 변화같은 것은 설명할 겨를마저 없어 진다.누구나 아직은 이 절실함을 전체문화의 구조속에서 시급한 문제로 파악하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좋은 판본 만들어내기와 읽을 수 읽게 독자의 눈앞에까지 책을 가져다 주는 작업이 없는한,책을 읽자는 모든 행사와 그 의미부여는 실은 무성과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반성해보아야 할것이다.
좋은 책,특히 고전을 읽자라는 말에 누구도 반대할 사람은 없다.그러나 우리의 고전읽기는 실상 외국고전에 편중돼 있다.우리의 고전들은 서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평균적인 국민이 교양으로 읽을수 있을만큼 잘 만들어진 판본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삼국유사」만 해도 전문가가 읽을 텍스트는 있지만 보통사람이 쉽게 볼만한 판본을 찾기는 어렵다.이점에서는 「춘향전」마저도 같은 입장이다.이 때문에 책을 읽자라고 하는 권유는 때로 실제로 어떤 책을 읽자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미래의 삶을 위해서도 책읽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옳은 견해이다.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정보화사회는 간혹 책의 효용은 이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착각을 일으키기는 한다.그러나 책은 매체로만 기능해 왔던 물체가 아니다.책이라는 형식 그 자체가 독립된 인간의 창조물이다.내 손에 쥐고 지면위에서 읽기를 한다는 일은,컴퓨터화면에서 읽기를 한다는 일과는 전혀 다른 문화감수성의 행위이다.때문에 기능적 정보자료들로 이루어진 책들은 축소될수 있으나 교양적 사색과 사상적 지주의 내용으로서의 책들은 오히려 고품위제품으로서 그 생명력에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을것 이라는데 모두들 동의하고 있다.
책읽기는 그러므로 여전히 강조되어야 한다.그러나 책읽기를 위한 사회적체제 속에서의 여건조성은 책을 읽자라는 구호적 권장만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좋은 책의 전달체계가 있어야 한다.우리는 이 전달구조를 이상하게도 평균 10평미만의 소형서점 단일채널로 운영해 오고 있다.그래서 지금 책은 「정가는 5천원쯤 되고 마진율은 30%가 돼야 하며 점두에서 매기가 계속되는 책」들만이 서점에 비치된다.우선 서점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수준의 책들보다 더 읽을만 하고 더 많은 책들은 어디엔가 전시할만한 거점조차 얻고 잊지 못하다.책은 제작되지만 창고에서 썩는다.
보다 잘 책읽기를 도와주는 공공도서관 역할 역시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연간 도서자료구입비가 백만원대에 있는 공공도서관마저 수십군데나 된다.그런가하면 도서구입비 예산증액 노력은 해마다 변함이 없이 좌절된다.이제는 책만이 아니라 비디오와 오디오자료도 공공도서관이 보유해야 한다는 변화같은 것은 설명할 겨를마저 없어 진다.누구나 아직은 이 절실함을 전체문화의 구조속에서 시급한 문제로 파악하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좋은 판본 만들어내기와 읽을 수 읽게 독자의 눈앞에까지 책을 가져다 주는 작업이 없는한,책을 읽자는 모든 행사와 그 의미부여는 실은 무성과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반성해보아야 할것이다.
1992-09-2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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