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정비석씨의 생애와 문학세계/세태 변화 리얼하게 묘사… “이야기꾼”/서울신문 연재 「자유부인」,장안 화제로/“문학은 재미·진실 담아야” 평생 지론 실천
19일 80세로 타계한 소설가 정비석씨(본명 정서죽)는 평생을 글쓰기에 몸바친 문단의 거목.
그는 순수·통속으로 확연히 갈라진 이분법적인 문단풍토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이 대중작가라는 오명을 두려워 해 주저하고 있던 부분에 용기있게 뛰어들어 우리 소설의 새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그는 「성황당」「제신제」등 토속적 삶을 예술성 짙게 표현한 작품에서부터 「자유부인」「노변정담」등 세태를 묘파한 작품들,「연산군」「민비」「명기열전」등의 역사 대하소설에 이르기까지 각기 성격을 달리하는 분야에서 수많은 명편들을 남겼다.또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까지 실렸던 금강산 기행문 「산정무한」처럼 뛰어난 수필을 쓰기도 했다.
특히 그를 기억되게 하는 것은 세상의 명리를 좇지 않는 그의 후덕한 인품과 문학의 길을 외곬으로 지켜온 치열한 작가정신.그는 문단의인기작가 또는 원로작가로서 어울리는 많은 공직을 마다하고 오직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여 왔다.『작가란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써야지요』라며 7순이 넘기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그의 자세는 지금도 수많은 후배작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11년 평북 의주 태생으로 일본대학 문과를 중퇴한 정씨는 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졸곡제」,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이 당선되면서부터 소설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초기 작품들에서 밀도있고 예술성 짙은 본격문학을 지향했던 그는 해방후부터 대중적인 통속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는 「문학은 문학성과 대중성을 조화해야 한다」는 그의 문학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게 있어 문학이란 진실을 담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대중문학은 문학도 아니라는 편벽된 논의는 하루속히 불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평소의 지론처럼 그는 직접 작품으로써 대중과 엘리트문학인 사이의 벽깨기를 실천했다.
그가 54년 서울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 「자유부인」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6·25후 미국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사회적 퇴폐풍조를 배경으로 가정을 뛰쳐 나온 대학교수의 부인이 남편의 제자와 일으키는 「춤바람」을 다룬 이 작품은 발표당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정씨를 일약 베스트셀러작가로 부상시켰다.또한 이 작품은 당시 서울대 법대 황산덕교수,홍순엽변호사,그리고 작가인 정씨 사이에 이른바 「자유부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었는데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황교수와 정씨가 이젠 모두 고인이 되고 말았다.
「자유부인」의 대중적 성공은 단순히 애정이나 통속성에 머물지 않고 해방 후 서구 자유주의 물결로 조성된 사치와 허영의 풍속도를 묘파한 세태 풍자에 있었다는 것이 문단의 평가다.
그는 또 73세 때인 84년에 「소설 손자병법」을 발간,국내 출판사상 첫 1백만부 판매 기록을 세우는 대중적 성공을 다시 한번 거두었다.그의 「소설손자병법」은 책으로선 국내에선 처음으로 TV에 광고되는 기록도 세웠으며 이후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온 고전의 현대적 국역물의 효시가 됐다.문단 일각에선 그의 대중적 성공을 그의작품을 평가하는 증표로 삼기 전에 바른 삶과 지혜를 제시하는 방편으로서의 고전 새로 읽히기의 의미,견실한 전업작가로서의 정씨의 삶에 대해 보다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평소 그와 절친한 교유를 가졌던 시인 구상씨는 정씨를 『붓 하나로 일생을 산 결곡한 분이었다』며 『신문소설의 대가로 시대 풍조를 예민하게 묘파한 작가였다』고 회고한다.<백종국기자>
19일 80세로 타계한 소설가 정비석씨(본명 정서죽)는 평생을 글쓰기에 몸바친 문단의 거목.
그는 순수·통속으로 확연히 갈라진 이분법적인 문단풍토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이 대중작가라는 오명을 두려워 해 주저하고 있던 부분에 용기있게 뛰어들어 우리 소설의 새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그는 「성황당」「제신제」등 토속적 삶을 예술성 짙게 표현한 작품에서부터 「자유부인」「노변정담」등 세태를 묘파한 작품들,「연산군」「민비」「명기열전」등의 역사 대하소설에 이르기까지 각기 성격을 달리하는 분야에서 수많은 명편들을 남겼다.또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까지 실렸던 금강산 기행문 「산정무한」처럼 뛰어난 수필을 쓰기도 했다.
특히 그를 기억되게 하는 것은 세상의 명리를 좇지 않는 그의 후덕한 인품과 문학의 길을 외곬으로 지켜온 치열한 작가정신.그는 문단의인기작가 또는 원로작가로서 어울리는 많은 공직을 마다하고 오직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여 왔다.『작가란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써야지요』라며 7순이 넘기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그의 자세는 지금도 수많은 후배작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11년 평북 의주 태생으로 일본대학 문과를 중퇴한 정씨는 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졸곡제」,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이 당선되면서부터 소설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초기 작품들에서 밀도있고 예술성 짙은 본격문학을 지향했던 그는 해방후부터 대중적인 통속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는 「문학은 문학성과 대중성을 조화해야 한다」는 그의 문학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게 있어 문학이란 진실을 담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대중문학은 문학도 아니라는 편벽된 논의는 하루속히 불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평소의 지론처럼 그는 직접 작품으로써 대중과 엘리트문학인 사이의 벽깨기를 실천했다.
그가 54년 서울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 「자유부인」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6·25후 미국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사회적 퇴폐풍조를 배경으로 가정을 뛰쳐 나온 대학교수의 부인이 남편의 제자와 일으키는 「춤바람」을 다룬 이 작품은 발표당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정씨를 일약 베스트셀러작가로 부상시켰다.또한 이 작품은 당시 서울대 법대 황산덕교수,홍순엽변호사,그리고 작가인 정씨 사이에 이른바 「자유부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었는데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황교수와 정씨가 이젠 모두 고인이 되고 말았다.
「자유부인」의 대중적 성공은 단순히 애정이나 통속성에 머물지 않고 해방 후 서구 자유주의 물결로 조성된 사치와 허영의 풍속도를 묘파한 세태 풍자에 있었다는 것이 문단의 평가다.
그는 또 73세 때인 84년에 「소설 손자병법」을 발간,국내 출판사상 첫 1백만부 판매 기록을 세우는 대중적 성공을 다시 한번 거두었다.그의 「소설손자병법」은 책으로선 국내에선 처음으로 TV에 광고되는 기록도 세웠으며 이후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온 고전의 현대적 국역물의 효시가 됐다.문단 일각에선 그의 대중적 성공을 그의작품을 평가하는 증표로 삼기 전에 바른 삶과 지혜를 제시하는 방편으로서의 고전 새로 읽히기의 의미,견실한 전업작가로서의 정씨의 삶에 대해 보다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평소 그와 절친한 교유를 가졌던 시인 구상씨는 정씨를 『붓 하나로 일생을 산 결곡한 분이었다』며 『신문소설의 대가로 시대 풍조를 예민하게 묘파한 작가였다』고 회고한다.<백종국기자>
1991-10-20 8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