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까 다짜고짜 시비를 걸더니 『그 총린가 뭔가가 그렇게 좋걸랑 따라 댕기다가 세째 ×노릇이나 하지 논설위원은 왜 하고 있느냐』고 남녘의 진한 억양을 지닌 여인의 말투가 수화기에서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신원도 밝히지 않은 채 퍼붓는 이 원색의 폭언을 물리적 폭력으로 환치한다면 유혈이 낭자한 테러가 될 것 같다.
그런중에서도 하필이면 「세째×」 노릇이나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싶어 실소를 머금고 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그러고나서 생각해 보니 기왕에 폭력 앞에 노출되었을 바에야 생각한 것을 정직하게 말해보는 것이 옳겠다는 마음이 든다.
최근에 명동성당의 K신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최루가스 속에서 자고 새느라고 목에 병을 얻은 것 같다고 호소하면서도 화해의 노력을 사명으로 이리닫고 저리닫고 하는 K신부가 실제로 많이 지쳐 있다는 것이었다. 사제에서 쇠파이프나 심지어 화염병용으로 갖춰 둔 병을 깨들어 위협하기를 서슴지 않는 민중시위꾼과도 맞서야 하고,추기경이나주교의 출입에까지 불경을 예사로 삼는 대치공권력 사이에서 고달픈 일이 없을 리가 없다.
K신부와는 개인적으로 조금 아는 사이다. 아드님 두 분을 다 성직에 바치고 따님댁에서 사시는 노모를 고향처럼,마음이 뿌리처럼 소중히 여기는 신부다. 아드님 일이 궁금하고 걱정스러우면 팔순노모께서 하염없이 문밖만 내다보며 지내시기 때문에 먼 곳에 여행을 갈 때에는 차라리 다녀와서야 보고를 드린다는 그는 자애롭고 효성스런 아드님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분규와 혼란의 와중에서 시간시간 화면에 비치고 있으니 늙으신 어머님의 걱정은 더욱 많아지셨을 것 같다.
K신부가 비치는 것보다 더 빈도가 높게 강기훈씨 모습도 화면에는 비친다. 잘자란 청년처럼 번듯하고 윤기도 나 보이는 젊은이다. 이런 젊은이가 궁지에 몰려 공권력이 「잡으러 가자,잡으러 가자」하고 날마다 벼르는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일이 생각해 보면 너무 애석하다. 그 풍모와 능력을,정상적이고 건강한 삶에 투입했더라면 이 할일 많은 세상에 얼마나 요긴한 인력이 되었을까 싶어 번번이아쉬워진다.
새하얀 동정이 유난히 돋보이는 까만저고리 모습의 고 김귀정양 영정도 비칠 때마다 속상하고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반듯하고 영특해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 대학생활을 끝내고 사회에 기여하며 살았더라면 그의 삶은 삶대로 빛나고 주변도 기쁘게 했을 것이다. 그 영특함을 살려 가정이든 사회든 공헌하며 살았더라면 우리 사회는 더 나아졌을 것이 틀림이 없다. 그 한스럽고 고통스런 죽음 대신 능력있고 빛나는 젊은이가 되어,못나고 모자라는 것이 많은 기성세대가 이뤄놓은 사회를 개혁해 가는 일꾼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런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맡기고 회심의 미소를 띠며 사는 노년을 우리는 바라고 있다. 이런 생각이 잘못일까
그런 젊은이에게 가당치도 않은 「민중혁명정부수립」의 환상적인 꿈을 심어주고 그 주검 앞에서 『귀정이와 이 정권을 함께 묻어 버리겠다』고 호언하며 선동하는 기성세대가 정말로 원망스럽다. 이런 나의 생각도 잘못된 것일까.
하다못해 5년만 젊어도 다시 시작해 보고,다시 배워보고 싶은 학문과 기술과 과학이 새록새록 쏟아져 나온다. 알라딘의 램프나 화수분보다도 더 신기한 컴퓨터 앞에서 낙오된 노병처럼 쓸쓸한 기성세대에 비하면 젊은이들에게는 너무도 매력있는 지식과 할일들이 날마다 쌓인다.
젊음의 그 왕성한 호기심과 능력으로 이런 할일을 욕심껏 확보했다가 정의롭고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면 이 사회는 또 얼마나 발전하겠는가.
우리가 젊은이에게 「운동권」 대신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이 잘못인가.
첨단공법과 장비 덕인지 매끈하게 포장된 깨끗한 도로 위에 「운동권 경력」말고는 생활을 위해,사회를 위해 쓸만한 공헌을 한 공적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일단의 어른들을 「지도자로 모시고」 『쳐부수자』 『타도하자』라는 단순구호만을 반복하며 길고 긴 행렬로 시간을 소모하며 행진하던 갖가지 장례행렬이 너무도 낭비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보는 것도 잘못인가.
섬유산업의 발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그 크고 좋은 천들을 그렇게도 많이 늘어놓고 폭력용어만을 그득그득 써넣은 만장들은 또 얼마나 아까웠는가. 혼자서는 물론 둘이서도 들기어렵도록 만든 그 호화스런 만장을 통해 풍요를 구가하는 현실에서 역설중의 역설을 맛보았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주먹을 들어 율동적으로 흔들며 구호를 외치는 집단의 훈련된 시위의 흥취에만 취하여 살도록 만든 것이 그 젊은이들을 위하는 일이라는 주장에 나는 아무래도 동의할 수가 없다.
며칠전 KBS가 방영한 「김일성의 퍼레이드」를 보며 그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담뱃재를 재떨이에 떠는 법이 없어서 수입한 호스티스와 술먹고 노는 자리에까지 진공청소기를 든 「인민」이 송구스럽게 따라다녀야 하는 「지도자선생님」을 위해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치라고 강요하기 위해 벌이는 그 장엄한 퍼레이드. 지치디 지친 표정으로 「만세」를 절규처럼 외치는 그 인민들 행진의 모골송연함이 우리 젊은이들의 시위에도 분명 전염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영특하고 빛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그 소름끼치는 시위성 열병에서 깨어나 대학생답게 공부하고 수련하고 성장하여 한사람 몫의 당당한 시민으로 나라와 사회와 부모에게 공헌하기를 바라는것이 시위를 부추기는 일보다 정의롭지 못하고,도덕적이지 못하고,양심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에 나는 승복할 수가 없다.
지금은 이만한 말을 하기에도 핍박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라는 것이 서글프지만 진작에 그런 노력을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 이제는 반성되어야 한다는 뜻에서도 말하기를 포기할 수가 없다. 빛나는 재능과 당당한 풍모와 소중한 우리의 젊은이가 궁지에 몰려 쫓겨다니며 숭고한 성직의 길을 가는 사제를 계속 곤혼스럽게 만들고 영영 그렇게 쫓기는 일생을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을 그냥 방치한다는 것은 낫살이나 든 어른들이 할 짓이 아니다. 그들이 좋은 어른이 되어 부패와 무능으로 지탄받는 기성세대의 어깨를 딛고 서서 먼곳을 향해 나아가 주기를 바라기 위해서도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중에서도 하필이면 「세째×」 노릇이나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싶어 실소를 머금고 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그러고나서 생각해 보니 기왕에 폭력 앞에 노출되었을 바에야 생각한 것을 정직하게 말해보는 것이 옳겠다는 마음이 든다.
최근에 명동성당의 K신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최루가스 속에서 자고 새느라고 목에 병을 얻은 것 같다고 호소하면서도 화해의 노력을 사명으로 이리닫고 저리닫고 하는 K신부가 실제로 많이 지쳐 있다는 것이었다. 사제에서 쇠파이프나 심지어 화염병용으로 갖춰 둔 병을 깨들어 위협하기를 서슴지 않는 민중시위꾼과도 맞서야 하고,추기경이나주교의 출입에까지 불경을 예사로 삼는 대치공권력 사이에서 고달픈 일이 없을 리가 없다.
K신부와는 개인적으로 조금 아는 사이다. 아드님 두 분을 다 성직에 바치고 따님댁에서 사시는 노모를 고향처럼,마음이 뿌리처럼 소중히 여기는 신부다. 아드님 일이 궁금하고 걱정스러우면 팔순노모께서 하염없이 문밖만 내다보며 지내시기 때문에 먼 곳에 여행을 갈 때에는 차라리 다녀와서야 보고를 드린다는 그는 자애롭고 효성스런 아드님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분규와 혼란의 와중에서 시간시간 화면에 비치고 있으니 늙으신 어머님의 걱정은 더욱 많아지셨을 것 같다.
K신부가 비치는 것보다 더 빈도가 높게 강기훈씨 모습도 화면에는 비친다. 잘자란 청년처럼 번듯하고 윤기도 나 보이는 젊은이다. 이런 젊은이가 궁지에 몰려 공권력이 「잡으러 가자,잡으러 가자」하고 날마다 벼르는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일이 생각해 보면 너무 애석하다. 그 풍모와 능력을,정상적이고 건강한 삶에 투입했더라면 이 할일 많은 세상에 얼마나 요긴한 인력이 되었을까 싶어 번번이아쉬워진다.
새하얀 동정이 유난히 돋보이는 까만저고리 모습의 고 김귀정양 영정도 비칠 때마다 속상하고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반듯하고 영특해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 대학생활을 끝내고 사회에 기여하며 살았더라면 그의 삶은 삶대로 빛나고 주변도 기쁘게 했을 것이다. 그 영특함을 살려 가정이든 사회든 공헌하며 살았더라면 우리 사회는 더 나아졌을 것이 틀림이 없다. 그 한스럽고 고통스런 죽음 대신 능력있고 빛나는 젊은이가 되어,못나고 모자라는 것이 많은 기성세대가 이뤄놓은 사회를 개혁해 가는 일꾼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런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맡기고 회심의 미소를 띠며 사는 노년을 우리는 바라고 있다. 이런 생각이 잘못일까
그런 젊은이에게 가당치도 않은 「민중혁명정부수립」의 환상적인 꿈을 심어주고 그 주검 앞에서 『귀정이와 이 정권을 함께 묻어 버리겠다』고 호언하며 선동하는 기성세대가 정말로 원망스럽다. 이런 나의 생각도 잘못된 것일까.
하다못해 5년만 젊어도 다시 시작해 보고,다시 배워보고 싶은 학문과 기술과 과학이 새록새록 쏟아져 나온다. 알라딘의 램프나 화수분보다도 더 신기한 컴퓨터 앞에서 낙오된 노병처럼 쓸쓸한 기성세대에 비하면 젊은이들에게는 너무도 매력있는 지식과 할일들이 날마다 쌓인다.
젊음의 그 왕성한 호기심과 능력으로 이런 할일을 욕심껏 확보했다가 정의롭고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면 이 사회는 또 얼마나 발전하겠는가.
우리가 젊은이에게 「운동권」 대신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이 잘못인가.
첨단공법과 장비 덕인지 매끈하게 포장된 깨끗한 도로 위에 「운동권 경력」말고는 생활을 위해,사회를 위해 쓸만한 공헌을 한 공적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일단의 어른들을 「지도자로 모시고」 『쳐부수자』 『타도하자』라는 단순구호만을 반복하며 길고 긴 행렬로 시간을 소모하며 행진하던 갖가지 장례행렬이 너무도 낭비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보는 것도 잘못인가.
섬유산업의 발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그 크고 좋은 천들을 그렇게도 많이 늘어놓고 폭력용어만을 그득그득 써넣은 만장들은 또 얼마나 아까웠는가. 혼자서는 물론 둘이서도 들기어렵도록 만든 그 호화스런 만장을 통해 풍요를 구가하는 현실에서 역설중의 역설을 맛보았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주먹을 들어 율동적으로 흔들며 구호를 외치는 집단의 훈련된 시위의 흥취에만 취하여 살도록 만든 것이 그 젊은이들을 위하는 일이라는 주장에 나는 아무래도 동의할 수가 없다.
며칠전 KBS가 방영한 「김일성의 퍼레이드」를 보며 그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담뱃재를 재떨이에 떠는 법이 없어서 수입한 호스티스와 술먹고 노는 자리에까지 진공청소기를 든 「인민」이 송구스럽게 따라다녀야 하는 「지도자선생님」을 위해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치라고 강요하기 위해 벌이는 그 장엄한 퍼레이드. 지치디 지친 표정으로 「만세」를 절규처럼 외치는 그 인민들 행진의 모골송연함이 우리 젊은이들의 시위에도 분명 전염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영특하고 빛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그 소름끼치는 시위성 열병에서 깨어나 대학생답게 공부하고 수련하고 성장하여 한사람 몫의 당당한 시민으로 나라와 사회와 부모에게 공헌하기를 바라는것이 시위를 부추기는 일보다 정의롭지 못하고,도덕적이지 못하고,양심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에 나는 승복할 수가 없다.
지금은 이만한 말을 하기에도 핍박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라는 것이 서글프지만 진작에 그런 노력을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 이제는 반성되어야 한다는 뜻에서도 말하기를 포기할 수가 없다. 빛나는 재능과 당당한 풍모와 소중한 우리의 젊은이가 궁지에 몰려 쫓겨다니며 숭고한 성직의 길을 가는 사제를 계속 곤혼스럽게 만들고 영영 그렇게 쫓기는 일생을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을 그냥 방치한다는 것은 낫살이나 든 어른들이 할 짓이 아니다. 그들이 좋은 어른이 되어 부패와 무능으로 지탄받는 기성세대의 어깨를 딛고 서서 먼곳을 향해 나아가 주기를 바라기 위해서도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1991-06-21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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