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생경제의 불안은 경제정책의 일관성 결여로 인해 파생되었고 일관성 결여는 경제내각의 잦은 경질에 그 원인이 있으며 이로 인해 제6공화국의 경제철학이 표류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6공화국이 출범할 때만 해도 산업간·지역간·계층간 불균형을 시정하고 공정하고 고른 분배를 통해 경제정의를 실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른바 경제정의의 실현이 6공화국 출범 당시 경제철학이었다. 지난 88년 2월20일 취임한 나웅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재직하고 있을 때 발표한 「선진추화합경제 추진대책」을 보면 경제정의의 실천수단으로 토지과다보유 억제를 위한 종합토지세제와 지하경제 축소 및 응능부담과세를 위하여 금융실명제와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실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정책방향을 제시했던 나 부총리는 취임 후 10개월을 넘기지 못한 채 물러났고 조순 부총리가 88년 12월5일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조 부총리가 취임하여 첫 번째 내놓은 경제운용계획을 보면 나 부총리 때보다 한층 더 계층간·부문간 형평성 제고가 강조되어 있다. 그는 택지소유상한제와 개발이익환수 등 토지공개념확대 도입방안을 강구하여 89년 상반기중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금융실명제의 경우 실시시기를 91년으로 못박고 실시에 대비하여 실무대책반을 운용하겠다고 다짐했다.
조 부총리 취임 이후 경기가 침제해지기 시작,89년 경제성장률이 6.7%로 전년 절반수준으로 급강하했지만 그는 금융실명제는 예정대로 91년 실시키로 하고 90년 하반기에 예행연습을 실시하여 실시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겠다는 방침을 밀고 나갔다. 그가 손수 만든 것으로 알려진 「경제난국극복을 위한 특별보고」(89년 12월)를 보면 당시 노사간의 극심한 대립과 마찰을 감안하여 경제사회안정기반을 확보하는 데 경제운용의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 부총리는 우리 경제사회의 불안과 성장잠재력을 저해시키는 큰 요인이 사회 각계각층의 갈등 구조의 심화에 있다고 보고 제도개혁을 강력히 추진할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조 부총리는 경제정책기조를 분균형 시정 내지는 형평성 제고에 두었고 그것은 6공화국 출범당시 경제철학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기조는 재벌그룹과 일부 정치권으로부터 강력한 반발과 저항을 받았다.
3당통합 이후 재계와 정계가 랑데부하는 과정에서 조 부총리의 정책은 걸림돌이 되었고 이로 인해 또다시 경제내각의 개편이 단행되었다. 1년3개월 정도 재임한 그가 물러난 후 새로 등장한 이승윤 경제팀은 경제정책기조를 성장 우선으로 급선회시켰다. 90년 3월17일 취임한 이 부총리는 취임 한 달도 되기 전에 4·4경제활성화종합대책을 내놓았다. 금융실명제를 유보하는 것을 비롯하여 경기부양을 위해 기업에 시설자금공급을 확대하고 제2금융권 금리를 1% 인하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하루아침에 경제정책기조가 형평 및 안정에서 성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부총리의 의욕에 찬 성장지향적 정책기조는 곧 이어 밀어닥칠 물가폭등에 밀려 안정과의 잠정적 밀월관계에 들어갔다. 그는 90년 하반기 경제운용계획에서 어쩔 수 없이 「한자리 수 물가」를 지켜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이 부총리는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물가가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왕성했던 성장의욕을 다시 불태우려 했지만 91년 새해초부터 물가파동이 재연되자 그 책임을 지고 퇴임했던 것이다.
대략 11개월 정도 부총리자리를 지킨 그는 결국 성장과 안정 사이를 오가다 좌초한 셈이다. 성장과 안정의 그 어느 것도 정책기조가 되지 못했던 암울한 1년이 지난 다음 취임한 최각규 부총리의 선택은 분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취임한 2월달에 소비자물가가 1.2%나 올랐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안정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부총리뿐만 아니라 경제정책 수행에 70% 정도 파워를 쥐고 있다는 재무부 장관의 수명 또한 1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재무부 장관들은 공교롭게도 한건의 주요한 조치를 단행한 뒤 얼마되지 않아 물러났다. 사공일 재무부 장관은 대출금리자유화조치를 단행한 지 5일 만에,이규성 재무부 장관은 12·12 증시안정화대책을 발표한 뒤 석 달 뒤에,정영의 재무부 장관은 금융시장개방조치를 취한 지 5일 만에 퇴임했다. 재무부 장관이 바뀌면 전임 장관이 이른바 한건을 하기 위하여 발표했던 조치들이 흐지부지되었다.
금리자유화조치만 하더라도 88년 12월 이후 2년 이상 낮잠을 자다가 미국의 금융시장개방 압력에 의해 최근 다시 거론되고 있고 증시안정화대책은 그 조치 자체가 정책미스로 판단되어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물론 인물이 바뀌면 나름대로의 경제철학에 따라 정책의 일부가 변경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정책의 뼈대는 유지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국민들이 정책을 믿고 따를 수 있다. 최근 시국불안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물가불안과 부동산가격 폭등 등 민생경제의 불안정에 있다. 다른 하나는 6공화국 출범 당시 표방했던 제도개혁을 통한 경제정의 실현이 부진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데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현 시국불안정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면 표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물가불안 해소와 부동산투기의 억제가 시급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부가 개혁의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현 경제팀은 물가안정과 경쟁력 강화를 정책기조로 삼고 있다. 왠지 개혁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것 같다. 현 시국불안의 보다 근본적인 요인인 상대적 빈곤감 내지는 박탈감을 제거하기에는 역부족한 정책기조이다. 따라서 현 경제팀은 6공화국의 경제 뿌리(철학)를 되찾을 뿐 아니라 제도개혁을 보다 가시화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경제정의의 실현이 6공화국 출범 당시 경제철학이었다. 지난 88년 2월20일 취임한 나웅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재직하고 있을 때 발표한 「선진추화합경제 추진대책」을 보면 경제정의의 실천수단으로 토지과다보유 억제를 위한 종합토지세제와 지하경제 축소 및 응능부담과세를 위하여 금융실명제와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실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정책방향을 제시했던 나 부총리는 취임 후 10개월을 넘기지 못한 채 물러났고 조순 부총리가 88년 12월5일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조 부총리가 취임하여 첫 번째 내놓은 경제운용계획을 보면 나 부총리 때보다 한층 더 계층간·부문간 형평성 제고가 강조되어 있다. 그는 택지소유상한제와 개발이익환수 등 토지공개념확대 도입방안을 강구하여 89년 상반기중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금융실명제의 경우 실시시기를 91년으로 못박고 실시에 대비하여 실무대책반을 운용하겠다고 다짐했다.
조 부총리 취임 이후 경기가 침제해지기 시작,89년 경제성장률이 6.7%로 전년 절반수준으로 급강하했지만 그는 금융실명제는 예정대로 91년 실시키로 하고 90년 하반기에 예행연습을 실시하여 실시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겠다는 방침을 밀고 나갔다. 그가 손수 만든 것으로 알려진 「경제난국극복을 위한 특별보고」(89년 12월)를 보면 당시 노사간의 극심한 대립과 마찰을 감안하여 경제사회안정기반을 확보하는 데 경제운용의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 부총리는 우리 경제사회의 불안과 성장잠재력을 저해시키는 큰 요인이 사회 각계각층의 갈등 구조의 심화에 있다고 보고 제도개혁을 강력히 추진할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조 부총리는 경제정책기조를 분균형 시정 내지는 형평성 제고에 두었고 그것은 6공화국 출범당시 경제철학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기조는 재벌그룹과 일부 정치권으로부터 강력한 반발과 저항을 받았다.
3당통합 이후 재계와 정계가 랑데부하는 과정에서 조 부총리의 정책은 걸림돌이 되었고 이로 인해 또다시 경제내각의 개편이 단행되었다. 1년3개월 정도 재임한 그가 물러난 후 새로 등장한 이승윤 경제팀은 경제정책기조를 성장 우선으로 급선회시켰다. 90년 3월17일 취임한 이 부총리는 취임 한 달도 되기 전에 4·4경제활성화종합대책을 내놓았다. 금융실명제를 유보하는 것을 비롯하여 경기부양을 위해 기업에 시설자금공급을 확대하고 제2금융권 금리를 1% 인하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하루아침에 경제정책기조가 형평 및 안정에서 성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부총리의 의욕에 찬 성장지향적 정책기조는 곧 이어 밀어닥칠 물가폭등에 밀려 안정과의 잠정적 밀월관계에 들어갔다. 그는 90년 하반기 경제운용계획에서 어쩔 수 없이 「한자리 수 물가」를 지켜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이 부총리는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물가가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왕성했던 성장의욕을 다시 불태우려 했지만 91년 새해초부터 물가파동이 재연되자 그 책임을 지고 퇴임했던 것이다.
대략 11개월 정도 부총리자리를 지킨 그는 결국 성장과 안정 사이를 오가다 좌초한 셈이다. 성장과 안정의 그 어느 것도 정책기조가 되지 못했던 암울한 1년이 지난 다음 취임한 최각규 부총리의 선택은 분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취임한 2월달에 소비자물가가 1.2%나 올랐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안정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부총리뿐만 아니라 경제정책 수행에 70% 정도 파워를 쥐고 있다는 재무부 장관의 수명 또한 1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재무부 장관들은 공교롭게도 한건의 주요한 조치를 단행한 뒤 얼마되지 않아 물러났다. 사공일 재무부 장관은 대출금리자유화조치를 단행한 지 5일 만에,이규성 재무부 장관은 12·12 증시안정화대책을 발표한 뒤 석 달 뒤에,정영의 재무부 장관은 금융시장개방조치를 취한 지 5일 만에 퇴임했다. 재무부 장관이 바뀌면 전임 장관이 이른바 한건을 하기 위하여 발표했던 조치들이 흐지부지되었다.
금리자유화조치만 하더라도 88년 12월 이후 2년 이상 낮잠을 자다가 미국의 금융시장개방 압력에 의해 최근 다시 거론되고 있고 증시안정화대책은 그 조치 자체가 정책미스로 판단되어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물론 인물이 바뀌면 나름대로의 경제철학에 따라 정책의 일부가 변경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정책의 뼈대는 유지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국민들이 정책을 믿고 따를 수 있다. 최근 시국불안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물가불안과 부동산가격 폭등 등 민생경제의 불안정에 있다. 다른 하나는 6공화국 출범 당시 표방했던 제도개혁을 통한 경제정의 실현이 부진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데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현 시국불안정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면 표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물가불안 해소와 부동산투기의 억제가 시급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부가 개혁의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현 경제팀은 물가안정과 경쟁력 강화를 정책기조로 삼고 있다. 왠지 개혁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것 같다. 현 시국불안의 보다 근본적인 요인인 상대적 빈곤감 내지는 박탈감을 제거하기에는 역부족한 정책기조이다. 따라서 현 경제팀은 6공화국의 경제 뿌리(철학)를 되찾을 뿐 아니라 제도개혁을 보다 가시화해야 할 것이다.
1991-06-08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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