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은 2차대전 이후 미국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을 분석한 명저로 꼽힌다.일본인이 국화(國花)인 국화(菊花) 재배술을 육성하는 등 예술을 중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칼’을 숭상하는 모순되는 문화적 특징을 두 상징물에 담았다.
그러나 베네딕트가 한국을 연구했다면 ‘무궁화와 무엇’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선뜻 “예”라고 답하기엔 망설여진다.우리 일상은 그만큼 나라꽃인 무궁화와 멀리 떨어져 있다.
●화공과 학생이 ‘무궁화전도사’ 된 까닭은?
이런 척박한 현실을 바꿔보기 위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에 덤벼든 이가 ‘디자인 윌’의 김영만(42)대표다.그가 ‘무궁화 전도’에 나선 이유는 무얼까? 화학공학과를 마치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다 디자인 현상 공모에 두 차례 당선된 뒤 디자이너가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김씨의 무궁화 사랑의 이면에는 별난 사연이 들어있다.
“늦깎이로 대학원에 다니던 96년 꽃자료를 찾으러 교보서점에 들렀다가 무궁화에 관한 자료는 5∼6개에 불과한데 비해 벚꽃과 국화에 관한 책은 수백개나 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누군가 ‘무궁화 알리기’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죠.하지만 정부에 기댈 수는 없고 돈이 안되는 일이라 기업에 기대하기란 더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혼자서 틈틈이 무궁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업무 시간을 쪼개서 사진 2000여컷을 찍었고 관련 자료를 뒤졌다.그리고 자신의 특기를 살려 부드러운 이미지의 무궁화 캐릭터를 그려가기 시작했다.부드럽고 예쁘게 그려야만 ‘진딧물이 많아 눈병이나 부스럼을 옮긴다.’는 등의 잘못된 선입관을 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묵묵히 ‘무궁화 사랑’ 작업을 계속해나가자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99년에는 70여명이 동참하면서 캐릭터 제작이 프로젝트라고 부를만큼 커졌다.그 중 고른 2002점으로 대한민국 인터넷 디자인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했다.김씨의 열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온 라인으로 뻗어 2000년 8월15일 웹 사이트 ‘무궁나라(www.mugungnara.com)’를 오픈했다.
●캐릭터·게임개발… ‘무궁나라’ 오픈
“어른들의 선입관을 바꾸기에는 힘에 부치더라고요.그래서 아직 생각의 틀이 잡히지 않아 편견이 없는 아이들의 감성에 호소하기로 한 거죠.온 라인에서 캐릭터나 게임을 통해 무궁화와 친해진 아이들이 자랐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웹 사이트 ‘무궁나라’는 다양한 캐릭터로 동심을 사로잡았다.특히 매일 물도 주면서 진짜 무궁화를 기르는 것처럼 꾸민 게임은 아이들에게 ‘교훈과 재미’ 두마리 토끼를 주려는 학부모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회원이 한때 10만명을 넘었다.
2001년 10월에는 만해기념관에서 사이버상에서 예비심사를 거친 100여명의 어린이와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무궁화 사랑 백일장’을 열었다.2002년 3월에는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전시회를 열어 중견미술작가 33인이 그린 다양한 무궁화 50여점을 선보였다.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그의 ‘무궁화 사랑 전선’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가장 큰 이유는 재정 문제.사이트를 운영하는데만 연 1억5000여만원이 들었고 게임을 업그레이드하고 전시회 등의 이벤트를 병행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 감당할 수가 없었다.‘무궁 나라’라는 깨진 독에 물을 붓듯 돈을 쓰게 만들어 ‘디자인 윌’의 경영마저 위태롭게 했다.김씨는 눈물을 머금고 지난해 6월 사이트를 폐쇄했다.
“준공익 성격의 무료사이트라 개인이나 기업이 운영하기엔 한계가 많았습니다.회사 수입의 상당 부분을 ‘무궁 나라’에 투입하다 보니 나중엔 중견 디자인회사 축에 들던 ‘윌’마저도 휘청거렸습니다.자기 일처럼 해준 직원들 앞에서 저는 부끄러운 CEO가 됐지요.그러나 무궁화로 나아가는 길에서 회의를 품은 적은 없습니다.”
문화관광부 행정자치부 산업자원부 등 관련 부처에 지원요청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무궁화 사랑으로 숱한 포상을 받고 포털 사이트를 포함한 50개 대형 사이트가 ‘무궁 나라’를 추천사이트로 선정하는 등 ‘명예’는 줄지어 따라왔지만 정작 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부처나 단체는 전무했다.
그러나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처럼 최근 김씨에게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호스팅 사용료를 낮춰 주겠다는 등 주위 사람들의 지원 제의가 들어와 이달 중순 분신같은 ‘무궁 나라’를 다시 연다.무궁화를 사랑하다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본 김씨지만 ‘무궁화 짝사랑’은 한결같다.
●나리꽃 천대하는 것은 ‘철학 부재’ 탓
“땅이라는 땅은 모두 산업화에 이용하다보니 무궁화 심을 공간이 줄어들었으니 일반인들에게 낯설게 보이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그러나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의 방관은 ‘철학의 부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50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국화(國花)가 그저 애국가와 더불어 TV 종영을 연상시키는 꽃 정도로 인식되는 현실을 왜 방치하는지….국가 브랜드 시대 운운하면서 정작 나라의 상징인 무궁화는 찬밥 신세로 계속 내버려두고 있는 형국이죠.”
김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 ‘엄숙주의의 유령’이 남아 있다.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들이 태극기를 응원의 ‘소도구’로 사용하자 불경스럽다는 지적이 적지 않아 이슈가 될 정도였다.그러나 김씨는 이제 무궁화를 ‘민중 속으로’ 내려오게 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그는 자신이 홀로 꾸려온 ‘온 라인 무궁화 심기’가 부활하고 오프 라인으로 가지를 뻗어나가야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제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씨는 자신이 한 일을 낮춰 말한다.“제게 ‘무궁화 전도사’라는 호칭은 과분합니다.사재를 털어 품종개량에 힘쓴 유달영 박사님이나,무궁화 연구에 평생을 바친 송원섭 임목육종연구소 실장 같은 분들의 노고에 비하면 부끄럽죠.”
300여종의 품종에다 약재와 차로도 쓰이고 품종 개량으로 벚꽃보다 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다는 등 김씨의 무궁화 예찬은 끝없이 이어진다.그러면서 나라꽃을 천대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날선 소리를 던졌다.“흔하디 흔한게 ‘무슨 무슨 날’인데 왜 나라꽃인 ‘무궁화의 날’은 없는 거죠? 숱한 축제 가운데 ‘무궁화 축제’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요즘에는 무궁화를 TV 종영 시간에 화면으로 밖에 볼 수 없어요.정말 안타깝습니다.”
글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그러나 베네딕트가 한국을 연구했다면 ‘무궁화와 무엇’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선뜻 “예”라고 답하기엔 망설여진다.우리 일상은 그만큼 나라꽃인 무궁화와 멀리 떨어져 있다.
●화공과 학생이 ‘무궁화전도사’ 된 까닭은?
이런 척박한 현실을 바꿔보기 위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에 덤벼든 이가 ‘디자인 윌’의 김영만(42)대표다.그가 ‘무궁화 전도’에 나선 이유는 무얼까? 화학공학과를 마치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다 디자인 현상 공모에 두 차례 당선된 뒤 디자이너가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김씨의 무궁화 사랑의 이면에는 별난 사연이 들어있다.
“늦깎이로 대학원에 다니던 96년 꽃자료를 찾으러 교보서점에 들렀다가 무궁화에 관한 자료는 5∼6개에 불과한데 비해 벚꽃과 국화에 관한 책은 수백개나 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누군가 ‘무궁화 알리기’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죠.하지만 정부에 기댈 수는 없고 돈이 안되는 일이라 기업에 기대하기란 더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혼자서 틈틈이 무궁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업무 시간을 쪼개서 사진 2000여컷을 찍었고 관련 자료를 뒤졌다.그리고 자신의 특기를 살려 부드러운 이미지의 무궁화 캐릭터를 그려가기 시작했다.부드럽고 예쁘게 그려야만 ‘진딧물이 많아 눈병이나 부스럼을 옮긴다.’는 등의 잘못된 선입관을 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묵묵히 ‘무궁화 사랑’ 작업을 계속해나가자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99년에는 70여명이 동참하면서 캐릭터 제작이 프로젝트라고 부를만큼 커졌다.그 중 고른 2002점으로 대한민국 인터넷 디자인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했다.김씨의 열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온 라인으로 뻗어 2000년 8월15일 웹 사이트 ‘무궁나라(www.mugungnara.com)’를 오픈했다.
●캐릭터·게임개발… ‘무궁나라’ 오픈
“어른들의 선입관을 바꾸기에는 힘에 부치더라고요.그래서 아직 생각의 틀이 잡히지 않아 편견이 없는 아이들의 감성에 호소하기로 한 거죠.온 라인에서 캐릭터나 게임을 통해 무궁화와 친해진 아이들이 자랐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웹 사이트 ‘무궁나라’는 다양한 캐릭터로 동심을 사로잡았다.특히 매일 물도 주면서 진짜 무궁화를 기르는 것처럼 꾸민 게임은 아이들에게 ‘교훈과 재미’ 두마리 토끼를 주려는 학부모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회원이 한때 10만명을 넘었다.
2001년 10월에는 만해기념관에서 사이버상에서 예비심사를 거친 100여명의 어린이와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무궁화 사랑 백일장’을 열었다.2002년 3월에는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전시회를 열어 중견미술작가 33인이 그린 다양한 무궁화 50여점을 선보였다.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그의 ‘무궁화 사랑 전선’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가장 큰 이유는 재정 문제.사이트를 운영하는데만 연 1억5000여만원이 들었고 게임을 업그레이드하고 전시회 등의 이벤트를 병행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 감당할 수가 없었다.‘무궁 나라’라는 깨진 독에 물을 붓듯 돈을 쓰게 만들어 ‘디자인 윌’의 경영마저 위태롭게 했다.김씨는 눈물을 머금고 지난해 6월 사이트를 폐쇄했다.
“준공익 성격의 무료사이트라 개인이나 기업이 운영하기엔 한계가 많았습니다.회사 수입의 상당 부분을 ‘무궁 나라’에 투입하다 보니 나중엔 중견 디자인회사 축에 들던 ‘윌’마저도 휘청거렸습니다.자기 일처럼 해준 직원들 앞에서 저는 부끄러운 CEO가 됐지요.그러나 무궁화로 나아가는 길에서 회의를 품은 적은 없습니다.”
문화관광부 행정자치부 산업자원부 등 관련 부처에 지원요청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무궁화 사랑으로 숱한 포상을 받고 포털 사이트를 포함한 50개 대형 사이트가 ‘무궁 나라’를 추천사이트로 선정하는 등 ‘명예’는 줄지어 따라왔지만 정작 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부처나 단체는 전무했다.
그러나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처럼 최근 김씨에게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호스팅 사용료를 낮춰 주겠다는 등 주위 사람들의 지원 제의가 들어와 이달 중순 분신같은 ‘무궁 나라’를 다시 연다.무궁화를 사랑하다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본 김씨지만 ‘무궁화 짝사랑’은 한결같다.
●나리꽃 천대하는 것은 ‘철학 부재’ 탓
“땅이라는 땅은 모두 산업화에 이용하다보니 무궁화 심을 공간이 줄어들었으니 일반인들에게 낯설게 보이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그러나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의 방관은 ‘철학의 부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50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국화(國花)가 그저 애국가와 더불어 TV 종영을 연상시키는 꽃 정도로 인식되는 현실을 왜 방치하는지….국가 브랜드 시대 운운하면서 정작 나라의 상징인 무궁화는 찬밥 신세로 계속 내버려두고 있는 형국이죠.”
김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 ‘엄숙주의의 유령’이 남아 있다.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들이 태극기를 응원의 ‘소도구’로 사용하자 불경스럽다는 지적이 적지 않아 이슈가 될 정도였다.그러나 김씨는 이제 무궁화를 ‘민중 속으로’ 내려오게 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그는 자신이 홀로 꾸려온 ‘온 라인 무궁화 심기’가 부활하고 오프 라인으로 가지를 뻗어나가야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제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씨는 자신이 한 일을 낮춰 말한다.“제게 ‘무궁화 전도사’라는 호칭은 과분합니다.사재를 털어 품종개량에 힘쓴 유달영 박사님이나,무궁화 연구에 평생을 바친 송원섭 임목육종연구소 실장 같은 분들의 노고에 비하면 부끄럽죠.”
300여종의 품종에다 약재와 차로도 쓰이고 품종 개량으로 벚꽃보다 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다는 등 김씨의 무궁화 예찬은 끝없이 이어진다.그러면서 나라꽃을 천대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날선 소리를 던졌다.“흔하디 흔한게 ‘무슨 무슨 날’인데 왜 나라꽃인 ‘무궁화의 날’은 없는 거죠? 숱한 축제 가운데 ‘무궁화 축제’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요즘에는 무궁화를 TV 종영 시간에 화면으로 밖에 볼 수 없어요.정말 안타깝습니다.”
글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2004-06-07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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