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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숲의 말/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시인

[문화마당] 숲의 말/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시인

입력 2022-10-12 20:06
업데이트 2022-10-13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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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시인
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시인
가을은 다람쥐에게도 용기를 준다. 인기척이 있으면 얼씬도 않던 다람쥐들이 용기백배해서 도토리를 찾아 숲속을 뛰어다니는 걸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소심하기로 치면 다람쥐 못지않은 청설모의 출현은 더 흔한 편에 속한다.

일터 뒤에 숲이 있어서 점심시간엔 산책을 한다. 산책도 책이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산길을 행간으로 나무와 새들의 신호를 더듬는다. 눈만이 아니라 점자라도 짚듯이 몸을 활용하는 독서는 퇴화된 감각들을 기민하게 한다. 귀는 잎사귀를 닮아 쫑긋거리고, 코끝은 땅 위로 내민 두더지의 코처럼 평소엔 맡을 수 없던 체취들을 찾아 깨어난다. 페이지를 넘기듯 스적이는 걸음이 멈춘 곳에 의자가 있다. 누군가 접어 놓은 흔적에 머물듯 의자에 떨어진 낙엽과 동석한 채 드높아진 가을 하늘을 본다. 은사시나무의 쭉 뻗은 흰 골격을 따라 잠시나마 내 안에 가을 하늘과 같은 여백이 흘러든다.

투명하고 명약관화해서 난해한 말을 쓰지 않지만 그 비의와 심오함을 잃지 않고 해석의 구름을 끝없이 피워 올리는 저 숲이야말로 고전 중의 고전이 아닌가 한다. 익숙한 구절들이고 이미 본 문장들이지만 다시 읽으면 언제나 처음 보듯 낯설고 새롭다. 은사시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기호에 지나지 않아 누가 그 질감에 대해 묻는다면 과연 뭐라고 해야 할 것인가. 수피를 스치는 잎이 눈에 들어온 오늘에야 비로소 수피의 무늬가 다이아몬드 무늬임을 안다. 은사시나무의 수피를 쓰다듬어 보면서 나는 겨우 은사시나무라는 기호와 식물사전류의 정보로부터 풀려나와 나의 감각을 마주한다. 그것은 일생을 고단한 노역으로 보내시고 떠난 육친의 못이 박인 손바닥과 같다. 유년 시절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나무 의자처럼 은사시나무는 하늘을 받치고 있다. 은사시나무와 나는 이렇게 처음으로 만난다.

정원 일을 좋아했던 소설가 헤르만 헤세가 왜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들을 땅속에 파묻어 버렸는지 이해가 간다. 그에게 유일한 단 한 권의 책은 바로 자연이었다. 인간의 언어와 문자는 자연을 거울로 삼을 때 비로소 망각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참된 우주의 질서에 참여하게 된다. ‘사람이 유자서(有字書)는 읽을 줄 아는데 무자서(無字書)는 읽을 줄 모른다’는 ‘채근담’의 한탄은 헤세의 정원 아래 묻힌 그 많은 유자서들의 죽음을 통해 정원의 생명들로 부활한 것이 아닐까. 헤르만 헤세는 생명의 문장을 다시 받아쓰기 위해 펜촉을 촉처럼 벼루었을 것이다.

저 숲의 나무들 중 몇몇은 창고에 저장을 해 놓은 다람쥐들의 양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숲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다람쥐들의 망각이 숲을 이루었다면 망각처럼 거룩한 것도 없다고 해야 한다. 여기에 관심을 보인 작가가 베아트릭스 포터였다. ‘피터 래빗’을 쓴 포터의 집요한 관찰에 따르면 다람쥐는 그냥 아무 데나 도토리를 묻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용이를 위해 어떤 규칙적 질서를 따라 도토리를 묻어 놓는다. 이걸 알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다람쥐를 깊이 있게 관찰한 것일까. 숲의 활자를 읽는 일이 이와 같다.

산책길에서 벗어나 숲속을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도토리 줍는 재미는 내 경험에 따르자면 중독성이 매우 강해서 멈추기가 힘들다.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게 좋다. 겨울 양식을 수탈해 가는 사람들에게 저항하듯 나뭇가지를 마구 뛰어다니며 솔방울을 투척하는 청설모를 보면 여간 심란한 게 아니다. 도시락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것이다.
2022-10-13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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