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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옥새5] 그녀의 정체는 영국 출신 신지학자

[황제의 옥새5] 그녀의 정체는 영국 출신 신지학자

류지영 기자
류지영 기자
입력 2020-04-18 20:58
업데이트 2020-04-1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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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발굴 구한말 배경 美 첩보소설 ‘황제의 옥새’ 5회

서울신문은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국인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을 주인공으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들 소설은 일제 병합 직전 조선을 배경으로 베델이 조선 독립을 위해 모험에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에 이어 ‘황제의 옥새’(1914년 출간·원제 The Great Cardinal Seal)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
네덜란드 출신 유명 화가였던 휘베르트 보스가 1898년 서울을 방문해 그린 유화‘서울 풍경’. 지금의 경복궁과 신문로, 태평로 등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서울신문 DB
네덜란드 출신 유명 화가였던 휘베르트 보스가 1898년 서울을 방문해 그린 유화‘서울 풍경’. 지금의 경복궁과 신문로, 태평로 등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서울신문 DB
‘이름:데오도시아 툴링, 주거지:도싯마운트(웨스트요크셔주 리즈시의 한 지역), 국적:영국’

새의 깃털을 장식한 스코틀랜드식 모자를 쓰고 낡은 군용 재킷을 입은 여성이 휘갈겨 쓴 고딕체 글자는 꼭 남성이 쓴 것 같았다. 여기에 쓴 글자만으로든 이 여인에 대해 더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서명 앞에 ‘미즈’(Ms·남녀평등의 상징적 표현)라고 써 놓은 것만 봐도 일반적인 여성은 아니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루이가 꽤나 실망한 듯 보였다.

“아...이럴 수가! 내 호텔에 코끼리가 투숙하는 것이 더 낫겠다. 앞으로도 골치 꽤나 아프겠는데...”

그녀의 방에서 짐이 이리 저리 움직였다. 한 30분가량 뭔가 계속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다시 불러서 세면대에 비누가 없다고 항의했다. 이 때 그녀는 루이에게 “이 호텔의 위생 상태가 좋지 않다”고 훈계했다고 한다. 사실 이곳이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위생’과는 담을 쌓은 곳이기도 했다. 자존심 하나는 세계 최고라는 프랑스에서 온 루이가 이 여인에게 괴롭힘을 당해 잔뜩 화가 난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데오도시아는 루이를 세 번째로 불러 목포에 있다는 12개 작은 불상의 소재를 물어봤다. 유럽에서 온 작은 호텔 주인이 그걸 어찌 알겠는가. 사무실로 돌아온 루이는 “이 여자를 시궁창에 던져 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와 식당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조선의 최고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당시 한국통감부 초대 통감)의 비밀경찰 다음으로 바쁘다는 일본 정보부 요원이 들이닥쳤다. 그는 손에 노트와 연필을 쥐고 이 여인을 막아섰다. 우리는 사무실 문 틈으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실례...합니다. 부인의 이름이...무엇입니까?”

그는 어설픈 일본식 발음의 영어로 물었다. 비음 섞인 소리가 우리에게도 들렸다.

“죄송합니다만...이건 제 임무...입니다. 조선에 오면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죠.”

“왜 내가 당신에게 제 이름을 말해야 하죠?”

데오도시아가 차갑게 대답했다.

“게다가 나를 ‘부인’으로 부르다니...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아주 무례한 호칭입니다.”

크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바보같아 보이지만 나름 일본식 공손함의 표시였다. 정보부 요원은 재차 “죄송합니다...부인”이라고 말했다.

“어휴...알았어요...내 이름은 테오도시아 툴링입니다. 영국인이고요. 서머싯주 도싯마운트라는 곳에서 왔습니다. 할머니 이름은...”

“죄송합니다만...철자를 천천히 불러 주시겠습니까?”

일본인 정보요원은 엘리트답게 일말의 동요 없이 비음섞인 영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알아듣기 어려우신가 보죠? 매우 드문 이름이라는 건 저도 잘 알아요.”

그녀의 분노가 조금 누구러진 듯 했다.

“제 성은 T-o-o-l-i-n-g, 그리고 저희 가문 문양은 그리핀 램판트(독수리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한 신화 속 동물)고요...”
일반적인 그리핀 램판트 문양. PIXABAY 제공
일반적인 그리핀 램판트 문양. PIXABAY 제공
“죄송합니다. 부인, 어디서 오셨다고 했죠?”

일본인이 이 질문을 할때는 루이와 나는 사무실에서 어쩔 줄 몰랐다. 데오도시아가 태연히 ‘아무말 대잔치’로 동문서답을 하며 정보요원을 가지고 놀았기 때문이다. 루이는 웃음을 참다 못해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일본인은 이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 했다.

“저희 가족 전체를 다 말해야 하나요? 아니면 영국 동부 지역으로 한정해서 말씀 드릴까요?”

“부인, 어디라고 말씀하셨죠?”

정보요원이 동양에서나 볼 수 있는 초인적 인내심을 보이며 계속 질문했다.

“루앙프라방(라오스), 바하왈푸르(파키스탄)에서 왔다고 쓰세요. 통킹(베트남)에도 있었는데...일단 다 쓰실 때까지 기다리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키 작은 정보 요원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당신의 직업은...무엇...입니까?”

그녀 역시 더는 참기가 힘들어진 듯 했다.

“아...정말 너무하네...이 호텔 주인이 어디 계시죠?”

데오도시아의 신경질 섞인 목소리에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루이가 웃음을 참고 로비로 달려갔다.

“주인장, 이 무례한 일본 남자를 여기서 나가라고 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우아하지만 영국인 특유의 호통치는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부인, 죄송하지만 이곳의 법을 따라 질문에 답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에게는 당신이 정보요원의 질문에 응하도록 도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럼 할 수 없죠. 이 사람에게 제 직업이 신지학(신비 체험이나 계시에 의지해 신의 본질을 추구하는 철학 사조) 강사이고 어두운 세상에 순수 이성의 빛을 전파하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세요.”

그녀는 마지막 대답이라는 걸 강조하며 말했다. 나는 그의 대답에 뭔가로 한 방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황제의 옥새’는 6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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