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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의 낮꿈꾸기] 코로나19 사태,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강남순의 낮꿈꾸기] 코로나19 사태,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입력 2020-04-13 17:50
업데이트 2020-08-3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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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대,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대,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 3월 12일 코로나19(COVID-19)를 세계적 대유행병으로 선포했다. 지금부터 약 한 달여 전이다. 코로나19는 짧은 기간에 강력한 파괴적 무기가 돼서 ‘세계 전쟁’을 일으키면서, 온 세계에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변화를 가져왔다.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인식하게 했다. 4월 13일 오전 9시 통계를 보면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확진자는 180만명이 넘었고 사망자 수도 11만명을 넘었다. 이러한 통계에는 감염 여부를 검진받을 의료시설조차 없어서, 확진자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나 사망자 수는 포함되지 않는다. 세계 곳곳에는 우리에겐 당연한 ‘흐르는 물에 손을 자주 씻는다’는 기본적인 규칙을 지키는 것조차 사치이며 불가능한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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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전능한 신의 개념 작동 안 해 ‘종교 위기’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세계 곳곳에서는 크게 정치, 경제, 의료 등 세 분야에서의 위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평소에는 표면에서 보이지 않았던 계층 간, 인종 간 또는 직업 간의 차이와 차별이 어떻게 이러한 전염병과 연결돼 있는가도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전문가들에 의한 위기 분석에서 종종 생략되는 분야가 있는데 그것은 종교의 위기이다. 이 사태를 통해 기업화한 많은 교회에서 절대화하던 것들이 ‘탈절대화’되면서, 종교의 존재의미에 대해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온라인 예배를 보거나 또는 아예 예배를 보지 않아도, 또는 매주 교회에 헌금을 내지 않아도 당장 심판하고 벌주는 신은 그 어디에도 없다. 기도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전지전능한 신’은 코로나19 앞에서 아무런 권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신의 개념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목도하게 됨으로써, 종교적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드러낸 것은 이러한 정치, 경제, 의료, 종교에서의 위기만이 아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이들이 얼마나 우리의 생명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중한 존재들인가를 뼈저리게 알게 됐다. 매일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원자재를 생산하는 이들, 집안에서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갖가지 물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 슈퍼마켓에서 물품을 배송하고 정리하고 판매하는 이들, 의사와 간호사는 물론 병원 곳곳을 청소하는 이들이나 간병인들, 자가격리자들을 돌보기 위해 주야로 일하는 공무원들, 복지시설에서 청소와 돌봄을 담당하는 이들, 각 가정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치우는 이들 등 우리의 단순한 생존을 위해 연결돼 있는 사람들의 리스트는 끝없이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삶에 진정으로 무엇이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상기시킨다. 우리가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근원적인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긴박한 위기상황에 놓인 우리는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에 대해 근원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의 삶에 정말 부여잡고 있어야 하는 ‘본질적인 것’은 무엇이며 과감히 포기하고 단절해야 하는 ‘비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가장 커다란 질문은 ‘인간이란 도대체 어떠한 존재인가’라는 것이다.

●나의 생명 유지는 무수한 것에 의존되어 가능

이번 위기를 통해 더 분명해진 사실은, 인간이란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의존성에 굳게 뿌리내리고 살 수밖에 없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나 ‘함께-존재’함을 의미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함께-살아감’을 의미한다. 이 다층적 위기를 경험하면서 우리 각자는 그동안 망각하고 살았던 근원적인 진리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됐다. 나의 생명 유지는 나 혼자만이 아닌 무수한 것에 의존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은 어떤 피상적인 철학적 전제나 감상적인 낭만적 표현이 아니다.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네 가지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자연과의 상호의존성이다. 인간이 이득의 극대화를 위해 정복과 독점, 개발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자연과 생태계의 ‘안녕’이 인간의 ‘안녕’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코로나19 사태는 깨닫게 한다. 기후변화, 미세먼지, 독소를 뿜어대는 공기는 실제로 인간의 무책임한 행위의 결과이다. 인간은 동물, 식물, 무생물 등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과 상호의존적인 삶을 살아간다.

둘째, 나와 타자의 상호의존성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적 연대’ 그리고 ‘사회적 상호의존성’의 의미로 확장된다. ‘나’의 건강과 안녕은 ‘너’의 안녕과 분리될 수 없다. 나와 타자는 서로를 지켜내고 책임져야 하는 연결된 존재들이다. 물론 여기에서 나의 ‘개인적 책임’이란 사회적 책임이나 국가적 책임의 문제와도 상호의존돼 있다.

●코로나19, 우리에게 ‘글로컬 시대’ 상기시켜

셋째, 내가 사는 지역과 세계의 상호의존성이다. 글로컬(glocal)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상호의존성을 잘 드러낸다. 글로컬은 ‘세계적’(글로벌·global)과 ‘지역적’(로컬·local)을 합친 용어이다. 소위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모토는 이미 그 한계를 드러낸다. 이제 ‘지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이 분리돼 존재할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도 단순하게 지역적이기만 하거나 세계적이기만 할 수 없다. 사람들의 필수품이 돼 가는 스마트폰이 만들어져서 우리 손에 들려지는 과정을 보면 지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경계를 긋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코로나19 사태는 ‘이곳’과 ‘저곳’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글로컬’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상기시킨다. 생각도, 행동도 그리고 책임지는 것도 ‘글로컬’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넷째, 정치와 종교의 상호의존성이다.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이 품고 있는 신에 대한 표상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전지전능한 신’, 잘하면 축복을 내리고 잘못하면 벌을 주는 ‘심판의 신’이다. 그런데 그러한 신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폭력과 테러의 기능을 하곤 한다.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 예를 들어 성소수자나 이슬람교도들과 같은 이들을 정죄하고 이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미 그 한계와 위험성이 드러난 전통적 신에 대한 표상을 가지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거부하면서, ‘전지전능한 신’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교회에서 예배보기를 포기하지 않는 교회들이 여전히 많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사사건건 관여하면서 기독교인이 기도하는 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악인을 심판하는 그러한 ‘전지전능한 신’이나 ‘심판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을 계속 부여잡고 있을 때 사람들은 비판적 사유를 하지 않음으로써 ‘악’에 가담하게 되며, 교회들은 자본주의화된 기업으로 전락한다. 정치는 언제나 그 사회의 종교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종교는 사람들의 인간관,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기에, 한 사회의 종교는 정치구조와 분리될 수 없다. 정치와 종교의 상호의존성 때문에, 한 사회의 종교적 성숙성과 정치의 성숙성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적 또는 사회적으로 극심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하나는 절망과 좌절 그리고 무력감과 냉소주의에 침잠하는 사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위기 속에서 자신의 삶을 근원적으로 돌아보고, 자신의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사람은 우리 자신 속에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이 양 축의 각기 다른 모습 사이에서 어떤 모습을 택할 것인가는 오롯이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무수한 ‘너’들과 연결돼 서로 의존하며 살고 있다는 상호관계성과 상호의존성의 인식을 통해, 이 코로나19 사태를 새로운 삶을 향한 전환점으로 삼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글 텍사스 크리스천대,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그림 김혜주 서양화가
2020-04-14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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