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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김영철, 김양건 후임 확실하다…대남 비서까지 물려받아”

“北 김영철, 김양건 후임 확실하다…대남 비서까지 물려받아”

입력 2016-01-20 07:12
업데이트 2016-01-20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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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소식통 “대남 비서로 임명되면서 군복 벗었을 것”

북한 김영철(70) 정찰총국장이 작년 말 사망한 김양건의 뒤를 이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은 물론 대남담당 비서직까지 물려받은 것으로 20일 전해졌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김영철은 김양건의 후임이 확실하다”며 “통전부장과 함께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의 비서직까지 물려받았다”고 밝혔다.

다른 소식통은 “김영철은 당 비서로 임명되면서 군복을 벗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노동당 비서는 김기남, 최룡해, 박도춘, 최태복, 강석주, 김양건, 곽범기, 오수용, 김평해 등 9명이었다.

노동당 비서는 전문부서의 부장보다 높은 직책으로 김영철이 김양건의 뒤를 이어 대남담당 비서와 통전부장을 겸하고 있다면 명실상부한 대남총책으로 부상했음을 의미한다. 군 출신이 당 비서로 임명된 것도 매우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일각에서는 공작 전문가인 김영철이 대남총책을 맡게 되면서 북한의 대남정책을 가름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북 소식통은 “김영철이 김양건의 후임으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로 임명됐다면 총참모부 산하 정찰총국의 국장직을 유지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자 국방위원회 서기실 책임참사인 김영철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 미국 소니사 해킹사건, 비무장지대(DMZ) 지뢰도발의 배후로 알려진 군부의 핵심 인물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남북대화에 관여한 북한 군부 내 대표적인 대남통이기도 하다.

그는 1989년 남북 고위당국자회담 예비접촉 때 북측 대표였고, 1990년 남북 고위급회담 때도 북측 대표단에 참여했다.

이후로도 ▲ 남북고위급회담 군사분과위 북측위원장(1992년) ▲ 남북정상회담 의전경호 실무자접촉 수석대표(2000년) ▲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북측대표(2006~2007년) ▲ 남북 국방장관회담 북측 대표단(2007년) 등을 맡아 남북대화에 관여했다.

2009년 중장에서 상장으로 승진하면서 대남공작 사령탑인 총참모부 정찰총국장에 임명됐다.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남북 함정 간 교전이 발생한 직후인 2014년 10월 7일 남측에 ‘긴급단독접촉’을 제의하면서 남측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의 파트너로 김영철을 제시한 바 있다.

당시 남측이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을 회담 대표로 수정 제의함에 따라 김영철은 같은 달 15일 류 실장과 서해 NLL, 대북전단 문제 등 남북 현안을 놓고 회담을 했지만,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연구전략실장은 “2010년 제3차 당 대표자회에서 김영철은 김정은의 바로 옆의 옆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는 그가 김정은의 핵심 측근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며 “김영철이 통일전선부장직에 잘 어울리지 않지만, 그동안 대남 협상과 공작에 관여해왔기 때문에 통전부 기능과 전혀 무관한 인물은 아니다”고 평가했다.

정 실장은 “김영철이 통전부장에 임명됐다면 통전부의 기능도 남북대화보다 대남 공작과 남남갈등 유도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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