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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비우고 마음 채워… 양심적인 곡 쓰고파”

“머리 비우고 마음 채워… 양심적인 곡 쓰고파”

입력 2013-03-29 00:00
업데이트 2013-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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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필과 ‘류재준의 밤’ 공연하는 현대음악작곡가 류재준

류재준은 ‘아침형 인간’이다.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먹어도 밤 11시면 잠자리에 들고, 아침 6시면 눈을 뜬다. 그는 “작곡도 직업이니까 규칙적이지 않으면 내가 괴롭다”며 웃었다.
류재준은 ‘아침형 인간’이다.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먹어도 밤 11시면 잠자리에 들고, 아침 6시면 눈을 뜬다. 그는 “작곡도 직업이니까 규칙적이지 않으면 내가 괴롭다”며 웃었다.
‘작곡가 류재준의 밤’. 새달 6일 경기도 문화의전당에서 경기필하모닉이 여는 공연 제목은 사뭇 도발적이다. 폴란드의 거장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80)의 후계자로 유럽에선 일찍부터 주목받았지만, 국내에선 낯선 작곡가의 곡으로만 채우겠다는 것. 생존 작곡가의 곡으로만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는 건 한국에서는 처음이다. 궁금했다. 류재준(43)이 누구인지.

“지난해 11월 경기필 구자범 지휘자를 만났다. 서울국제음악제 예술감독도 맡고 있어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만나는 김에 내 곡들을 들어보라고 했다. 죽을 만큼 술을 마셨다. 난 밤 11시면 자는데 그 친구는 오래 먹는 스타일이라 힘들었다. 하하하. 며칠 뒤 연락이 왔다. 내 곡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국내 교향악단이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눈여겨보는 게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공연에서 그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긴 진혼교향곡은 물론, 바이올린협주곡 1번과, ‘장미의 이름’ 서곡이 연주된다. 눈이 밝은 독자라면 눈치챘겠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발표 오페라의 서곡이다. 중세 수도원의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추리소설이지만, 이면에는 중세와 근대가 대립하는 신학 논쟁이 중심을 이룬 작품이다.

류재준은 “1995~96년쯤 ‘장미의 이름’을 읽었다. 깜짝 놀랐다. 완벽한 플라토니즘의 발현이었다. 큰 감동을 받아 언젠가 곡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2010년 독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곡을 위촉했다. 원하는 곡을 써보라기에 대뜸 ‘장미의 이름’ 얘기를 꺼냈다. 그는 “일단 서곡만 썼다. 2010년 수원시향이 초연했고, 핀란드 헬싱키필하모닉 등이 연주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와 ‘아이다’를 초연했던 이집트 카이로 오페라극장의 위촉으로 2014년까지 완성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내가 ‘납기’를 지키지 않는 편이라 제때 끝낼지 모르겠다. 퇴고를 많이 한다. 제일 두려운 게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을 내보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작품 얘기로 들어갈수록 신이 났다. 그는 “머릿속에 80% 정도는 돼 있다. 오페라 전체 요소들은 서곡에 다 들어 있다. 원작 그대로 가는 게 아니라 수도원장은 (성별을 바꿔) 알토로, 늙은 호르헤 수도사는 (젊은 캐릭터들에 주로 쓰는) 테너로 틀어볼 생각이다. 불구덩이 속에서 호르헤와 윌리엄 수도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에 대해 주고받는 대미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왜 음악 이외의 분야에 관심이 많은지 알 수 있다. 늦깎이다. 서울 현대고 3학년 때 진로를 틀었다. 고3 담임은 ‘음악은 집안을 서서히 망하게 한다’며 말렸다. 가족도 반대했다. “집에서 난리가 났다. 대학(서울대 작곡과)시절 집에 못 들어갔다”고 말했다. 1, 2학년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평균학점이 1.5, 0.9 정도였다. 1989년 서울대 음대입시 부정사건이 터졌는데 주위 친구들이 날 의심하더라. 하하하.”

놀 만큼 놀았다. 대학 2학년 때 정신을 차렸다. 4학년 때 중앙콩쿠르 작곡 1등으로 병역면제 혜택을 받고 1992년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부터 목적지는 폴란드 크라코프 음악원이었다. 펜데레츠키가 있기 때문. 하지만, 펜데레츠키는 제자를 키우지 않는다. 류재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곡한 악보를 보였더니 “너만한 작곡가는 이탈리아에만 500명쯤”이라고 했다. 이어 “카운터포인트(대위법)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돌아왔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내쳤다. 1년 뒤 또 찾아갔다. 같은 질문이었다. 대위법에 대해 2시간을 설명했다. 하지만, 펜데레츠키는 “다른 직업을 찾아보라”며 쫓아냈다.

또 1년이 흘렀다. 같은 질문을 했다. 1시간에 걸쳐 대위법을 설명했지만 역시였다. “펑펑 울고 나왔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올 생각이었다. 새벽 4시쯤 무턱대고 전화했다. 누군지도 묻지 않고 ‘카운터포인트가 뭐냐’고 하더라. 난 ‘디스커션(토론)과 다이알로그(대화)’라고 했다. 그제야 여권을 챙겨오라더라. ‘지금껏 넌 머리로만 경직된 음악을 썼다. 음악은 눈이 아닌 귀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음악은 가르쳐봤자 제2의 펜데레츠키밖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2년 동안 비용을 댈 테니 날 따라다녀라. 내가 하는 음악을 듣고, 만나는 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2년 뒤 펜데레츠키는 ‘하산’을 명했다. 10년이 흐른 2007년, 한국으로 돌아온 류재준은 젊고 유능한 국내외 연주자를 엮어 실내악 연주단체 앙상블오프스를 만들었다. 스페인 첼리스트 고(故) 파블로 카잘스를 기리는 카잘스페스티벌과 서울국제음악제 예술감독도 맡았다. 그는 “예술감독도 좋은 작곡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한다. 세계적인 연주자를 곁에서 지켜보는 건 굉장한 행운이다. 궁극적으론 성실한 작곡가가 되고 싶다. 아는 걸 꾸밈없이 보여주면서 양심적으로 곡을 쓰는 게 좋은 작곡가다.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욕심이 많다”며 웃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2013-03-29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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