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재난과 국가… ’ 출간
기양의례(祈禳儀禮)는 가뭄과 홍수, 전염병 같은 자연재해와 개인의 질병,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치르는 주술적이고 비정기적인 국가 의례를 일컫는다. 조선시대에 기양의례를 국가가 독점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1795년 2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과 함께 사도세자의 능인 현융원에 행차한 것을 기념해 만든 ‘원행을묘정리의궤’중 반차도의 일부. 친행기우 같은 기양의례의 국왕 행차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연·개인 재해 극복 국가서 관리
고려시대까지 기양의례는 대부분 불교와 도교, 무속의 영역에서 다뤄졌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가 후대 왕에게 전하는 유훈인 ‘훈요십조’에서 부처를 섬기는 연등(燃燈)과 하늘의 신령, 오악, 명산, 대천 등을 섬기는 팔관(八關)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에서 이런 전통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유교가 지배이념인 조선시대에서는 기양의례의 유교화가 급격히 진행됐고 왕권 강화로 이어졌다.
이욱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펴낸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창비)는 조선의 제사 체계인 사전(祀典)을 ‘재난에 대한 대응’이란 측면에서 고찰하면서, 재난이라는 불가항력적인 힘이 유교 이념과 국가권력에 따라 재조정되는 과정과 그 안에 내재한 왕권·신권 강화의 함수 관계를 연구했다.
저자는 고려의 기양의례가 기존 신앙의 영험성 위에 세워진 것인 반면 조선시대 유교의 기양의례는 국왕의 사회적 권위에 기반한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즉 재난을 일으키는 사특한 기운에 맞서거나 절박한 상황에서 백성은 초월적 힘을 요청하는데 이때 왕을 중심으로 한 집권화된 국가권력이 유일한 힘임을 강조했다. 가령 가뭄때 국왕이 하늘을 향해 잘못을 아뢰고 비를 간청하는 친행기우(親行祈雨)는 예전처럼 신의 영험성을 통한 재난 극복방식이 아니라 국왕의 상징성을 높이는 의례 형태를 취했다.
●무당 등 종교전문인 국가제사 배제
이런 바탕 위에 다른 종교의례들은 배척당했다. 성황신에 대한 일상적 의례와 4대 조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사묘’의 관리를 담당하던 무당 같은 종교 전문인이 점차 국가제사에서 배제되고, 기존에 민간신앙 차원에 맡겨두던 산천제를 유교적 제사로 바꾸는 등 기양의례의 국가 독점화가 이뤄졌다. 또한 재난 발생시 백성들이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영험처를 국가적 차원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통제했다. 사직이나 종묘처럼 제사를 거행하는 장소인 단묘를 일상공간과 분리해 축조·관리하면서 영적 세계를 통제하고 민심을 수습하려 애썼다.
저자는 국왕 중심의 기양의례 재정립이 국내외 정치상황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사림으로 대변되는 신권 중심의 정치 시스템이 숙종, 영조, 정조가 시행한 탕평정치에 의해 붕괴되면서 권력이 국왕에 집중됐고, 이는 국왕 중심으로 기양의례의 시공간이 재편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일례로 명나라 때까지 조선은 중화제국의 황제만이 행할 수 있는 친행기우를 금지당했으나 명이 멸망한 조선 후기 이후 친행기후를 지내는 대상과 횟수가 늘어났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2009-04-21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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