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조선의 민담·풍습 오롯이

1920년대 조선의 민담·풍습 오롯이

입력 2005-03-24 00:00
수정 2005-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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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한 외국인의 기록을 본지가 입수, 소개한다.20세기 초 20여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독일인 선교사 안드레 에카르트가 독일 귀국후인 1923년에 발간한 조선어교제문전(朝鮮語交際文典·이하 문전). 건국대 명예교수인 류태영(69) 박사가 이스라엘에서 입수해 본지에 제공한 것으로, 원래는 조선인과 독일인 모두가 쓸 수 있는 어학교재용으로 만든 책이다. 그러나 지금은 독일인 눈에 비친 조선의 이런저런 민담과 풍습이 오롯이 남아 있다는 점이 더 관심을 끈다.

문전은 책 구성에서부터 조선인과 독일인 모두를 위한 어학교재라는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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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볼 수 있던 서낭당. 문전에 따르면 이…
흔히 볼 수 있던 서낭당. 문전에 따르면 이… 흔히 볼 수 있던 서낭당. 문전에 따르면 이 서낭당은 로자(老子)를 모시던 장소다. 로자는 천자의 첩이 바람을 피워 낳은 아들로, 태어날 때부터 백발에 덥석부리여서 이름지어졌다. 장생불사하는 방법을 찾다 죽은 로자를 위로하기 위해 돌을 모아주고 춤을 바친다는 설명이다.
우선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양 부분은 독일어와 한국어로 씌어져 있다. 한국어 부분 역시 물론 에카르트가 직접 쓴 것이다. 또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됴션언문(朝鮮諺文)’에서는 한글자모의 발음을 로마자(羅馬字)로 설명하는 등 문자체계에 대한 설명도 보인다. 그리고 45개의 조선어로 된 이야기들로 본문을 구성했다. 부록으로는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의 일부가 실려 있고 독일어 번역을 위한 짧은 연습문 45개도 있다.

책 마지막에 저자 이름으로 ‘옥락안(玉樂安)’이라는 에카르트의 한국식 이름이 표기되어 있고 ‘정가금오원’과 ‘불허복제’라는 가격과 저작권 보호 표시까지 붙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본문 내용이다. 에카르트는 서언(緖言)에서 본문의 45가지 ‘니야기’(이야기)는 “조선 13도를 통하야 방방곡곡을 천답(踐踏)하며 연구에 연구를 가한 결과”라고 밝히고 있다. 에카르트의 성실한 노력 덕분에 교재를 읽다보면 어떤 이야기들이 1920년대 당시 조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는지 엿볼 수 있다.

만담과 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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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광화문 네거리 풍경. 경복궁 대신 조…
조선말 광화문 네거리 풍경. 경복궁 대신 조… 조선말 광화문 네거리 풍경. 경복궁 대신 조선총독부가 권력의 심장이 됐다. 문전에서는 ‘태황제(고종)께서 계시던 경복궁 대궐인데 시방 비었소.’라거나 육조에 대해서는 ‘시방으로 말하면 총독부요.’라는 한 행인의 설명이 등장한다.
산을 넘다 육혈포(권총)를 가진 도적을 만나 주인양반의 돈을 다 빼앗긴 하인이 “오늘 길에서 도적을 만났다하면 그 양반이 내 말을 곧이 아니 듣고 나를 의심하겠으니 당신 가진 육혈포로 내 옷에 구멍을 뚫어주면 그 보람으로 주인 양반에게 빙거(憑據·증거를 대다)하겠다.”고 도적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미련한 도적은 그만 “철환(총알)이 없다.”고 대답해버렸다.‘헛총만 가진 것’을 안 하인은 빼앗긴 돈을 되찾고 도적을 흠뻑 두드려주고 간다.(세번째 이야기 ‘도적을 속인 진담’)

이처럼 문전에는 만담류의 우스갯소리가 20여개로 가장 많다. 그냥 만담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판소리풍의 걸죽한 입담 역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땡볕에 김매는 팔자에 울상짓던 아내한테 괄시받은 한 농부는 벼슬하겠다며 서울로 훌쩍 올라간다. 이 농부 어찌어찌 벼슬얻어 풍악을 울리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데 이 풍악소리를 듣고 내뱉는 아내의 말이 감칠맛이다.“우리 양반인지 닷돈 세뭉치인지, 벼슬인지 닭의 벼슬인지, 군수인지 국수인지, 감사인지 곳감인지 한다고 시골인지 서울인지 가더니 아니오니 이 노릇을 장차 어찌하잔 말이냐.”

조선의 풍습

조선의 풍습에 대한 글도 찾아볼 수 있다. 풍습에 대해서는 에카르트의 세심한 관찰과 묘사가 잘 드러난다.‘조선에서 혼인하는 법’에서는 에카르트가 마치 결혼식을 옆에서 지켜본 듯 신랑·신부의 행색부터 결혼식까지의 전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또 조선의 풍습을 잘 모르는 외지인과 조선사람간의 대화체로 꾸며진 ‘귀신을 위하는 이야기’에서는 성주·터주 등 전통신앙에서부터 종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제사 풍습에 대해 순차적으로 설명해준다.

피할 수 없는 시대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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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원산부 천주당 명의로 발행된 어학용 …
조선 원산부 천주당 명의로 발행된 어학용 … 조선 원산부 천주당 명의로 발행된 어학용 교재 ‘문전’의 표지(위 왼쪽)와 로마자로 병기한 한글 자모의 발음(위 오른쪽),그리고 본문 내용(아래).외국인답지 않게 자유자재로 써내려간 필체에서 에카르트의 조선어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어학교재인데다 각 지방의 얘기들을 채록하는 형식이다보니 정치나 사회문제 같은 민감한 소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은근슬쩍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서울구경’편은 강원도 산골에 사는 김 생원이라는 사람의 서울 유람기가 담겨져 있다. 하루는 김생원이 임금 사는 곳을 보겠다며 경운궁으로 가는데 당시 경운궁에 유폐돼 있던 태황제(고종)를 두고 한 경인(京人)과 나눈 대화가 이렇다.“그러면 국사를 시방 누가 상관하오.”라고 김 생원이 묻자 “예 일본 통감부에서 모든 정사를 다 상관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그러면 그전보다 국민간에 모든 정사가 밝게 됩니까.”라고 묻자 “예 그 전보다 백성들이 참 평안히 살고 국사가 개명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한다.‘아무 것도 모르는’ 것으로 설정된 한 촌부의 질문이 묘한 느낌을 준다. 또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올랐던 선조가 겪는 고초도 ‘임금이 피란함’편에 상세히 실려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에카르트 신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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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에카르트 신부
안드레 에카르트 신부


안드레 에카르트는 1909년 천주교 베네딕트선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조선어를 익힌 뒤 경성제국대학에서 언어와 미술사를 강의했다.1928년 독일로 돌아간 에카르트는 20여년에 이르는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뮌헨대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의 언어, 미술, 음악, 무용,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다양한 글을 남겼다. 한국인 제자도 많이 길러냈는데 비운의 천재로 불리는 전혜린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에카르트의 저작 가운데 1929년 쓴 ‘조선미술사’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책은 조선 미술에 대한 최초의 통사 형식 서술이었고 한국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아직도 한국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으로 꼽힌다. 그는 이 책에서 거대하지만 실속은 없는 중국미술, 오밀조밀하지만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인 일본미술과 달리 한국 미술은 단아하고 소박한 자연미가 살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다 개개의 예술작품을 통해 한국의 미를 추출해내는 접근법을 쓰고 있어 책에 실린 500여점 도판은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에카르트는 그다지 기억에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미술사가 2003년에서야 열화당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이스라엘 유학중 ‘…文典’ 입수한 류태영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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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영 박사
류태영 박사 류태영 박사


국내에서 이스라엘 전문가로 손 꼽히는 류태영 박사는 이 문전을 1973년 이스라엘 유학시절 히브리대 중앙도서관 서고에서 처음 접했다. 히브리대 중앙도서관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당시에는 에카르트가 누구인지도 몰랐단다. 류 박사는 “독일 선교사인데도 또록또록한 한글로 재미있는 얘기를 너무 잘 풀어내서 ‘한국에 있었던 선교사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라며 읽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부하다 골치가 아프면 머리를 식힐 겸해서 이 책을 자주 읽다가 아예 복사본까지 마련해뒀다. 귀국한 뒤 이 내용을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해줬더니 “재미있다.”는 반응이 많아 최근에는 복사본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돌리기까지 했다. 유 박사는 “출판사에 물어보니 펴낸 지 80년이 넘어 저작권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틈나는 대로 현대문으로 풀어내 출간도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히브리 도서관에는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세계 각지에 흩어 살던 유대인들이 기증한 자료가 많다.”면서 “이 때문에 한국 관련 자료도 엄청난데 한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며 아쉬워 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05-03-2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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