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이슈 따라잡기] 민중의 글쓰기가 역사를 만든다

[출판계 이슈 따라잡기] 민중의 글쓰기가 역사를 만든다

입력 2004-08-28 00:00
수정 2004-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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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출판전문잡지에서 ‘한국생활사박물관’ 완간 기념 좌담회를 열었다.책을 만든 이들과 역사 및 생활사 전문가들이 한데 모여 이 시리즈의 성과를 진지하게 논의했다.기실 그동안 우리 역사는 정치사 중심의 서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그런 면에서 ‘한국생활사박물관’은 책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역사서술의 새로운 지평을 활짝 열어 놓았다.나는 좌담회에서 사회를 맡았는데,“이 시리즈는 나중에 박물관에 남을 만한 대작이다.”라는 말로 평가를 갈음했다.그런데 이날 좌담회에서 나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집을 진두지휘한 강응천 주간은 좌담회에서 생활사를 복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솔직히 토로했다.짐작하듯 자료가 태부족인 현실이 책을 만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고 한다.그나마 지배계층의 자료는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있어 다행이었다.문제는 민중의 생활을 생생하게 기록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가물에 콩나듯 어렵게 찾아낸 자료도 대체로 민중 스스로가 쓴 글이 아니라,지배층에서 민중을 다스리기 위해 조사한 자료들이었다는 것이다.좌담을 마치고 나서도 이 말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한 시대를 구성하는 다양한 계층의 삶 가운데 지배층의 것이 기록으로 남을 확률은 높다.역사라는 것이 아무리 객관성이나 실증성을 내세우더라도 결국은 승리자의 것임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그때 불현듯 떠오른 게 얼마 전 읽은 신광현 교수의 글이었다.

신 교수는 ‘언어 사중주’에서 글짓기가 사회변혁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했다.당연히 모든 글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관점으로 자신의 언어를 통해 자기 글을” 지을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연설명이 필요할 터이다.글짓기라는 게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보이지만,정치하게 분석해보면 사회적 권력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글을 쓸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사회적으로 제한되는 현실이 이를 입증한다.그러기에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쓴다는 것 자체가 민주화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1970∼80년대 기층민중들이 쓴 자서전 형식의 글들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말과 글은 나에게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주었다.글을 쓰는 행위는 전문가들의 영역이라 여기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소문자인 ‘그들의 이야기’가 모여 대문자인 ‘역사’가 되는 법이다.나의 이야기를 남이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스스로 쓰는 것은 그 자체가 정치적 실천이자 역사적인 행위이다.이 글짓기 자체가 신 교수의 주장처럼 글을 매개로 한 권력의 틀을 깰 뿐만 아니라,강 주간이 그토록 원했던 사료적 가치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보고 느낀 것을 진솔하게 밝히면 된다.편지 형식이면 어떻고 일기 형식이면 어떤가.중요한 것은 정직과 성실함이다.이제 꿈을 꿔보자.‘21세기 한국생활사박물관’의 서문에 우리가 남긴 기록에 크게 빚졌다는 헌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말이다.

이권우(출판평론가)
2004-08-2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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