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 새소설 ‘황진이’

전경린 새소설 ‘황진이’

입력 2004-08-06 00:00
수정 2004-08-0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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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염의 작가’ 전경린이 황진이(이룸출판사 펴냄)를 소설로 불러냈다.‘끼’라면 남 못지 않은 작가와 역시 ‘끼’라면 둘째가 서러운 조선시대 기녀와의 만남 자체로 눈길을 확 끈다.3일 서울 인사동에서 작가를 만나 작품구상과 자료 수집에서부터 황진이의 해석과 형상화 등 원고지 1540장에 자신을 태운 10개월의 여정을 들어보았다.

소설가 전경린
소설가 전경린 소설가 전경린
이태준·최인호,북한의 홍석중 등이 다루었던 인물을 다시 소재로 한 까닭은 무엇일까? “여고 시절 마냥 끌린 여성들이 나혜석 윤심덕 전혜린 그리고 황진이였다.‘언젠가 소설로 옮기고 싶다.’고 마음먹었다.게다가 등단 10년을 맞아 현재를 무대로 한 어떤 스토리도 황진이만큼 끌리지 않았다.”

조숙했던 여고생 전경린을 사로잡은 여성들은 모두 당대의 문제적 인물.여성문제를 감각적 문체로 빚어온 작가의 작품세계와 맥이 닿는다.따라서 곧바로 ‘전경린의 황진이는?’이라는 호기심으로 이어진다.“야담·야사는 황진이의 몸을 남자를 유혹하는 위험하고 저급한 것으로 규정하는데 저는 이것이 표피적이라 판단,몸 이데올로기를 긍정하고 존중했다고나 할까요.이야기 얼개는 야사를 존중했습니다.”

황진이의 정신적 세계에 무게를 뒀다는 말이다.그래서 작가는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홀려 파계하게 만들거나 서경덕을 유혹하는 장면을 단순하게 처리한다.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기생 황진이’의 가장 큰 자긍심은 역시 사랑”이라는 작가의 시선은 선비 이사종과의 사랑을 묘사할 때 어느 판본 못지않게 후끈하다.“자기 운명의 모순 속에 스스로 갇히면서도 그 속에서 억압을 풀어가는 황진이와 선비 이사종의 운명적 사랑을 그릴 때 제일 행복했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둘의 사랑은 절제된 열정이기에 더 뜨거워 가슴이 델 것 같다.

황진이를 낳기 위해 들인 공은 만만치 않다.야사나 야담은 샅샅이 훑었고 송도 거리를 그리기 위해 이중환의 택리지와 조선시대 생활사 관련자료 등 엄청난 자료를 섭렵했다.이런 내공은 서얼 차별이 조선시대에 시작됐다거나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한 설명,서경덕의 제자인 허난설헌과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과 토정 이지함의 사연 등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나아가 당대 유교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바라보는 비판으로 피어나기도 한다.“이전의 황진이 묘사는 남성적 서술에 유린당한 면이 있습니다.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품위 있고 진정한 학자이고 넘어가면 위선이라는 구분도 너무 작위적입니다.”

창작 도중 작가에게 힘을 준 것은 인간의 보편성이었다.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500년 전의 황진이나 현대 여성의 내면의식에 흐르는 동질성을 발견하고 자신감이 생겼고 이후에는 그 느낌을 따라갔다고 한다.

작가는 작중 인물에게 자신의 내면의식을 불어넣으면서 대화한다.그 과정에서 닮은 점도 발견할 것이다.“신분 차별의 희생양 황진이나 도읍의 영화를 한양에 내준 송도,유교 가운데 주변부 이론인 주기론의 서경덕 등 모두가 비주류잖아요.제도적 권위나 출세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제 생각과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이런 애정은 작품 끝까지 이어져 “갖은 세파를 넘어온 황진이 앞에 또 하나의 생이 열리는 듯한” 신비감 속에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2004-08-06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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