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영화 속 백설공주, 투우사로 변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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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은 그림형제의 동화 ‘백설공주’가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해였다. 발랄하고 아기자기한 이미지를 강조한 타셈 싱 감독의 ‘백설공주’, 원작에 판타지와 액션 장르를 결합시킨 루퍼트 샌더스 감독의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등은 모두 이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었다. 개봉을 앞둔 ‘백설공주의 마지막 키스’도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졌으나 별 감동이 없었던 할리우드산(産)과는 형식적, 내용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작품이므로 색다른 영화에 목말라 있는 영화팬이라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무성흑백 영상의 아름다움과 비극적 결말의 여운이 오래 맴돌 뿐 아니라 또 다른 창작으로서의 각색 작업에 대해 경이를 표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주인공 카르멘(마카레나 가르시아)의 아버지는 유명한 투우사였으나 카르멘이 태어나던 날 경기 중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가 되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해산을 하다가 숨을 거둔다. 사악한 계모는 남편을 살해한 뒤 카르멘마저 없애려고 하지만 카르멘은 곡절 끝에 난쟁이들을 만나 투우사로 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에서는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의 상황이 계속해서 맞물린다. 카르멘의 아버지가 6마리 황소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장면에 이어지는 끔찍한 사고, 카르멘의 탄생과 어머니의 죽음, 성찬식 파티에서 춤을 추던 할머니의 죽음 등이 그것이다. 카르멘이 성찬식에서 입었던 흰 드레스를 장례식을 위해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장면은 영화의 결말에 대한 강렬한 복선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작과 달리 좌절의 참담함이 주를 이루는 것은 이 영화가 철저히 현실적인 동화로 기획됐기 때문이다. 결말부에서 이러한 비극성은 최고조에 달한다. 투우사로서 최고의 기쁨을 맛본 후 그녀를 사랑하는 난쟁이가 무심코 전달한 사과를 먹고 쓰러진 카르멘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백설공주’와 오페라 ‘카르멘’이 만나는 장면. 카르멘의 차가운 몸은 장사꾼에게 넘겨지고 그녀는 죽어서도 농락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황소와 당당히 겨루는 강인한 여성이었음에도 그녀의 의지보다 더 힘차게 그녀를 몰고 간 것은 멜로드라마의 불가항력적인 ‘운명’이었던 것이다.

무성흑백이라는 영화의 형식은 이 같은 비극을 신파적 최루성 대신 고전에 대한 향수와 아련함으로 감싼다. 마임 연기와 클로즈업만으로 전달하는 인물들의 감정에는 거짓이 없으며, 화려한 플라멩코 리듬에 맞춘 빠른 카메라 워크와 감각적인 편집은 새삼 영상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채플린과 예이젠시테인이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무성영화들의 우아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201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5관왕을 차지한 ‘아티스트’(미셸 하자나비시우스)에 이어 ‘백설공주의 마지막 키스’가 호평을 받고 있는 현상은 의미심장하다. 프랑스 영화사의 거장 로베르 브레송은 “유성영화가 발명한 것은 침묵”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디지털영화의 시대가 발명한 것은 무성흑백영화”라고 하지 않았을까. 5월 1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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