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현지시간) 숨진 미국 팝의 전설 프린스(57)는 음악가로서뿐 아니라 창작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데도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미국 음악잡지 빌보드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에 따르면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고 들려주고 싶어했던 프린스는 1990년대 이런 자신의 뜻을 가로막는 워너브러더스 레코드와 분쟁 당시, 발음할 수 없는 상형문자로 이름을 바꾸고 얼굴에 ‘노예’라고 쓴 채 공개적인 자리에 등장하기도 했다.

1996년 워너와 결별한 뒤 인터넷을 통해 독립적으로 음악을 공개해 오다가 18년 만에 워너로부터 자신의 음악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은 뒤에야 재결합했다.

그 사이 음반 산업의 주류는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로 옮겨갔지만, 지난해 말까지도 스포티파이 같은 세계적인 음원 사이트에서 그의 앨범은 들을 수 없었고, 유튜브에서도 그의 음악이 사용된 영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프린스는 고가의 회원제로 운영되면서 음악가에게 높은 로열티를 지급하는 제이지의 타이달(Tidal)을 통해서 그의 앨범을 유통했다.

음악가의 권리를 위해 음반사뿐 아니라 팬들과의 소송도 마다하지 않았다.

2014년에는 소셜미디어에 공연 실황 음원 링크를 올린 22명을 상대로 2천200만 달러(약 251억원)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본명 프린스 로저스 넬슨은 재즈 음악가였던 아버지 존 루이스 넬슨이 자신의 예명인 프린스 로저스에서 따 온 것이다.

그는 프린스 외에도 많은 별명과 예명으로 활동했다.

워너와 분쟁 중에는 남성과 여성의 상징을 조합한 상형문자를 사용해 ‘러브 심볼’로 불렸고, ‘예전에 프린스로 알려졌던 아티스트’(The Artist Formerly Known as Prince)와 이 이름의 두문자어 ‘TAFKAP’도 사용했다.

다른 가수들의 곡을 써 줄 때나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는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네버마인드’, ‘제이미 스타’, ‘페이즐리 파크’, ‘조이 코코’ 같은 이름도 사용했다. 1980년대 대표 히트곡인 ‘퍼플 레인’에서 따 온 ‘퍼플 원’도 있다.

프린스는 킴 베이싱어, 마돈나, 카르멘 일렉트라 등 많은 스타와 염문을 뿌렸다.

정작 첫 번째 결혼은 코러스이자 댄서였던 마이테 가르시아와 했지만 아들이 출생 직후 숨지는 아픔을 겪었고,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마뉴엘라 테스톨리니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가 이혼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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