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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窓] 신발에 관한 명상/이재무 시인

[생명의 窓] 신발에 관한 명상/이재무 시인

입력 2016-10-14 17:48
업데이트 2016-10-1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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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시인
이재무 시인
개인의 학력이나 경력, 병력 사항 등을 기재하는 이력서(履歷書)의 ‘이’(履) 자는 ‘밟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신을) 신다, 행하다, 겪다, 지위에 오르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요컨대 신발의 역사가 곧 그가 살아온 삶의 내력인 것이다.

신발에는 문수가 있다. 새삼 돌이켜보니 문수가 바뀌지 않아도 되던 날로부터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둘씩 내 곁을 친구들이 떠났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날로부터 하나둘씩 꿈들이 내 곁을 떠나갔다는 회한이 든다. 문수를 바꾸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은 이미 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실 그때부터 나는 시나브로 순수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신발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젖게 된다. 내가 신발을 신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신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예컨대 신발이 나를 신고 직장에 가고, 극장에 가고, 술집에 가고, 애인들을 만나고, 은행에 가고, 집안 대소사에 가고, 동사무소에 가고, 전동차를 타고 내리고, 버스를 타고 내리며 현관에서 출발하여 현관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 드는 것인데, 이것은 내가 나날의 일상을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관성과 타성에 젖어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자조감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늦은 밤 귀가해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문득, 여기저기 함부로 널브러진, 여러 켤레의 신발들이 새삼스럽게 보였다. 저 신발들은 선박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이다. 현관이 항구라 한다면 신발들은 선박들인데 이 선박들은 아침마다 선박의 주인(식구)을 싣고 항구(현관)를 나서 바다(세상)를 항해 중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까닭 없이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쳐 올라 콧등이 시큰해졌다.

상갓집에 가면 문수 다른 신발들이 어지럽게 놓인 경우를 보게 된다. 경향 각처에서 꾸역꾸역 모여든 신발들이 갖가지 체위로 엇섞여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이것이 바로 우리네 현재적 삶의 축약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가슴에 다리 한 짝 척 하니 걸쳐 놓거나 또는 남의 짝과 배 맞춰 나란히 누워 있는 신발들을 보면 영락없이 우리네 이러저러한 생활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 같은 착시까지 드는 것이다. 요컨대 상갓집의 신발들은 생활 속 적나라한 관계들의 문란을 표상하고 있다는 생각에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것이다.

오래전의 일이다. 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는데 감쪽같이 신발이 사라졌다. 선물받은 수제화였다. 주인은 내게 누군가 버리고 간, 다 해진 신발을 건네주었다. 구멍 난 양심에게 있는 악담 없는 저주를 퍼부어 댔다. 그래도 맺힌 분이 쉽게 풀리지 않았지만 한참을 걷다 보니 문수가 맞는지 신발이 발에 맞아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투덜대는 내 마음을 읽어 내고는 발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한 게 여간 신통방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을 고치게 되었다. 본래부터 내 것이 어디 있으며 네 것이라고 영원한 게 있을까? 잠시 빌려 쓰다가 제자리에 놓고 가는 것, 그것이 우리네 짧고 서러운 일생 아니겠는가.

현관에는 여러 형태의 문수가 다른 신들이 놓여 있다. 일요일 저 신들은 저마다 신(神)을 만나러 갈 것이다. 교회로 성당으로 산으로 백화점으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해야 할 때 나는 신발을 닦는다. 내 신발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2016-10-1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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