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용서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박상숙 문화부장

[데스크 시각] 용서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박상숙 문화부장

박상숙 기자
박상숙 기자
입력 2017-07-24 17:52
수정 2017-07-24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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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숙 문화부장
박상숙 문화부장
“나, 오늘 화이트야!”

문화계 블랙리스트 얘기가 나오자 고은 시인은 입고 온 하얀색 남방을 내보이며 농을 걸었다. 얼마 전 본지가 창간 113주년 기념행사로 개최한 시 낭독회를 위한 저녁 자리. 연극배우 손숙이 자신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걸 얘기하며 시인을 향해 “선생님도 그렇잖아요?”라고 묻자 내놓은 멋들어진 대답이었다. 백팩을 메고 청년처럼 나타난 노시인의 유머에 웃음이 터졌다. 코미디 같은 시대 상황을 격조 있게 비트는 내공이 남달랐다.

사실 블랙리스트는 저질 코미디 같은 유치한 발상에서 시작됐다. 2차대전 후 소련과 체제 및 군비 경쟁에 몰두했던 미국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삐딱한’ 인사들을 가려내기 시작했다. 1949년 소련의 핵실험 성공에 조바심이 나던 차에 “반공”을 외치며 등장한 정치인 조 매카시에게 미국 정치권은 반색했다. ‘매카시즘’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인사들을 길들이고자 했던 연방수사국(FBI) 국장 에드거 J 후버에 의해 조장됐고, 극우 언론의 호들갑(미국 어디든 공산주의자들이 없는 곳이 없다)에 광풍으로 번졌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트럼보’는 바로 블랙리스트의 폭풍우를 지나온 할리우드 이야기다. 천재 시나리오 작가 달턴 트럼보는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간 할리우드 영화산업계 종사자 43명 중 하나였다. ‘알고 있는 공산당원을 대라’는 으름장에도 ‘고자질’을 거부한 트럼보를 비롯한 10명은 ‘할리우드 텐’으로 불리며 의회 모독죄로 감방에 처박혔고 일자리를 잃었다. 생계를 위해 가명으로 시나리오를 양산하던 그가 동료 이름으로 쓴 ‘로마의 휴일’은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으나 오스카 트로피가 그에게 전해진 건 사후 17년이 지나서였다. 할리우드를 20년간 억누른 블랙리스트는 영화인의 재능만 허비한 채 별무신통하게 끝났다.

반복은 역사의 숙명인가 보다. 일제강점기에 일상화된 검열과 억압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지속됐다. 정통성이 취약한 정권일수록 코웃음 나오는 블랙코미디를 엄숙하게 일삼아 왔다. 전직 대통령과 닮아 방송 출연을 금지당하거나 신문 연재소설에서 군인 출신 경비원을 시니컬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작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떠다녔다. 흘러간 줄 알았던 옛이야기는 지난 10년간 더욱 교묘하게 전개됐고, 직전 정권에선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총동원돼 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이번 주는 블랙리스트 진상 규명에 중요한 분수령이다. 사흘 뒤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을 지시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등에게 1심 선고가 내려진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취임 일성으로 약속했던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위원회도 이르면 주 내 돛을 올린다. 도 장관은 필요할 경우 직접 진상 조사위에 참여하고 문체부 내 관련자도 세세하게 들여다보겠다며 강도 높은 조사를 예고했다.

탄력 붙은 적폐청산 작업을 둘러싼 불편한 기색은 그래도 여전하다. 촛불 집회와 태극기 시위를 동일 선상에 놓고 국론 분열 운운하며 국정 농단에 대한 단죄를 위험한 정치 보복으로 몰아간다. 그래서일까. 요즘처럼 용서와 화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 적도 없었던 듯하다. 문제는 선후에 있다. 일본의 논객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시비를 판정하지 못하는 사회는 망할 수밖에 없다. 영어의 정의(Justice)에는 재판이란 뜻도 있다. 먼저 추상같은 법의 심판으로 정의를 세우고서야 용서를 꺼낼 수 있다. 법정에서도 형을 선고한 뒤 벌을 유예해 주지 않나. 용서는 그다음이다.

okaa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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